[우리차의 역사와 세계 차문화] 제6화 깨어진 文武大王碑로 알게 된 秺侯 金日磾와 茶 年代記
[우리차의 역사와 세계 차문화] 제6화 깨어진 文武大王碑로 알게 된 秺侯 金日磾와 茶 年代記
  • 김민석 박사
  • 승인 2020.11.10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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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태자 김일제→한나라→신(新)나라→신라로 차 문화 전파
칸수성 무위시의 남성문광장에 서있는 마왕신 투후 김일제 동상.
칸수성 무위시의 남성문광장에 서있는 마왕신 투후 김일제 동상.

한반도에 차문화가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가 서기 828년 통일신라시대에 당에서 김대렴공이 차 종자를 가져와 하동 쌍계사 주변에 심어 차 재배단지를 조성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시기를 800년 정도 거슬러 서기 48년 가야 김수로왕 시절에 허황후가 인도로부터 차 종자를 가져와 김해 동상동과 대성동 등지에 차밭을 조성했다고 한다.

위의 두 가지 설은 나름의 역사적 인물과 기록을 배경으로 하므로 역사적 사실로 인증한다. 그런데 과연 그 이전에는 한반도의 차문화에 대한 기록은 없을까? 연구를 하다가 한 가지 재미있는 기록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1. 문무대왕 비문의 내용

그 기록은 신라 문무대왕 비문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신라의 문무대왕은 신라의 30대 왕으로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법민이며, 김유신과 함께 신라군을 지휘하여 660년 백제를 정벌, 668년 고구려 정벌로 명실상부 삼국통일의 위대한 업적을 이룬 분이다.

그런데 681년 문무왕이 돌아가시면서 자신의 시체를 바다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시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불교식으로 경주 사천왕사에서 화장을 한 뒤 유골을 경주 감포 앞바다 용길리 해수욕장앞 200미터 지점에 있는 바위에 안장하게 되는데 이 바위를 후대의 사람들은 대왕암 또는 문무대왕릉이라 부른다.

이렇게 바다 한가운데 능을 만들다 보니 왕의 업적을 기록한 비문을 왕릉 주변에 설치할 수가 없어 문무대왕비문은 특이하게도 왕을 화장한 신라 남산 옆 사천왕사에 설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문무대왕비문의 내용이다. 비문에 따르면 문무대왕은 흉노의 후예이며, 자신의 15대 선조가 성한이며, 성한은 투후 김일제(秺侯 金日磾)의 7대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 과연 우리역사상에 존재하는 성한은 누구일까?

성한의 존재에 대해 문무대왕뿐만아니라 그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비문, 흥덕왕릉비문, 진철대사탑비문, 진공대사탑비문 등에 동일하게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금석문의 대가 김정희가 그의 저서 해동비고에서 문무대왕의 15대 선조인 세한을 성한이라고 인증하였다. 후대의 학자들도 다양한 연구 결과에서 성한은 세한과 동일인물이고 이름을 음차하여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생긴 해프닝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성한, 세한으로 불리는 인물이 경주김씨의 시조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알지도 동일인인데, 굳이 알지와 세한을 나누어 표기한 것은 세한이 한반도에 도래하기 전 조상들의 고향인 알타이의 음차라는 설과 후에 나올 토후 김일제의 어머니 이름인 알지(閼氏)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2. 중국역사서 자치통감의 내용

다음으로 성한의 7대조 투후 김일제에 대해 알아보자. 김일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초한지의 승자로 알고 있는 유방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자 한다. 한 고조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중원을 통일한 후 자신만만하게, 북방의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출병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흉노의 묵돌선우가 이끄는 40만 대군에 참패를 하였다.

중국의 역사서 자치통감에 의하면 기원전 199년 한 고조 유방은 패배이후 목숨을 구걸하고자, 첫째 한나라 공주를 흉노왕인 선우에게 시집보내며, 둘째 매년 식량과 비단 누룩을 조공으로 바치고 셋째, 한 고조 유방이 흉노 선우 묵돌의 아우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 넷째, 만리장성을 두 나라의 국경으로 하여 다시는 만리장성을 넘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변경에 관시를 만들어 교역을 할 수 있게 한다는 조건으로 화친을 청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돌아갈 수 있었다.

3. 중국역사서 한서 김일제편의 내용

그런데 중국의 역사서 한서(漢書) 김일제(金日磾)편에 의하면 한 고조 유방의 대패로부터 50년이 지난 한나라 7대 황제 무제(武帝)때인 기원전 144년에 이르러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다. 특히 기원전 121년 한나라에 곽거병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나오고 급기야는 칸수지방의 흉노를 정벌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休屠王)은 죽게 되고, 일제와 어머니 알지(閼氏) 등은 하루아침에 포로가 되어 노예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말을 다스리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인해 일제는 한 무제의 총애를 받게 되고, 결정적으로 한 무제의 암살을 막는 공을 세우게 된다. 이때 한 무제는 일제에게 2가지 선물을 하게 된다. 첫째가 투국의 제후라는 뜻으로 천자 다음가는 투후(秺侯)라는 관직을 주었다. 다음으로 일제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황금가면을 쓴 사람(祭天金人)이라는 뜻으로 金을 성으로 하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투후 김일제가 탄생하게 된다. 김일제 이후에도 투후는 세습되어 김일제의 차남인 김건(金建)의 손자 김당(金當)이 투후로 봉해지며, 다시 김당의 아들인 김성(金星)도 투후가 된다.

그런데 이즈음에 크나큰 사건이 김일제 후손에게 일어난다. 먼저 서기 8년에 왕망(王莽)의 집안과 김당의 집안에 의해 한(漢)나라가 망하고 신(新)나라가 건국된다. 그러다 15년이 지난 서기 23년 후한의 광무제인 유수에 의해 신나라가 반대로 멸망되어진다. 결국 신나라의 멸망과 후한의 건국으로 김일제의 후손들을 토국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고 중국의 기록에서는 사라진다.

4.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편의 내용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에서는 사라진 김일제의 후손들의 기록이 40여년이 지난 서기 65년 우리나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편의 기록에 다시 나타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탈해이사금이 금성 서편 시림(始林)에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 자리에 금궤(金櫃)가 있어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총명하여 이름을 알지(閼智)라 했고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하였다. 그리고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고 하고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이상의 우화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석씨 가문이 신흥 김알지 가문과 연합하여 시림을 대신하여 계림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해보면, 토후 김일제의 후손에 관계하여 먼저, 신나라의 멸망이 서기 23년, 그리고 김수로에 의한 가야의 건국이 서기 42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라에 김알지가 나타나는 시기가 서기 65년이다.

이후의 역사와 삼국통일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란 국호는 김일제의 후손인 김당이 세운 신나라와 무관하지 않으며, 신라의 수도 金城은 흉노족의 발원지 알타이(金城)와 김일제의 투국 수도 金城과 한자가 동일하다.

김일제를 중심으로 보면 알타이와 가야나 신라가 모두 한 핏줄이다. 특히 외삼촌인 김유신과 함께 삼국을 통일한 후 당과의 힘겨운 싸움을 승리로 이끈 문무대왕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선조의 역사와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당을 이긴 자신의 역사를 길이길이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5. 김일제를 중심으로 본 차 연대기

여기서 다시 우리의 주제인 차로 돌아 가보자. 당나라 진사 봉연이 저술한 봉씨문견기에 따르면 중국의 다신(茶神) 혹은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육우는 서기 733년에서 804년까지 살았다 어린 시절 그는 용계사라는 절에서 지적선사에게 차 시중을 들며 살았다. 12살에 용계사를 떠나 유랑극단으로 전국을 떠돌게 된다. 그러다 26세 때에 비로소 교연스님을 만나 진정한 다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서기 765년 그의 나이 33살에 그의 저서 다경(茶經)의 초고를 만들게 된다.

그런데 중국의 다신인 육우는 김대렴공에 비하면 80여년 정도 앞서나 김수로에 비하면 700년 정도 후에 인물이다. 중국의 차문화가 신농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역사적으로 신농은 우리와 같은 동이족 출신으로 분류되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우리나라 차문화는 중국이나 육우에서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며, 동이족인 신농에 의해 중국으로 전파되었다고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의 차문화는 유라시아대륙의 중심이라 볼 수 있는 파미르와 알타이산맥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흉노족과 깊은 관계가 있다. 기원전 199년 한 고조 유방이 흉노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도 험한 유목생활 중에 추위와 하루의 피로를 잊기 위해 끓여 마신 무쇠솥 동복 속의 밀크티 짜이가 바로 신라 차의 기원인 것이다. 이러한 짜이는 알타이와 돈황을 중심으로 세력을 이룬 휴도왕 시절에도 하나의 식문화로 존재했다.

그러다 기원전 121년 한 무제 때 곽거병과 휴도왕의 전투에서 휴도왕이 패배함으로 인해 휴도왕은 죽고 왕비 알지와 태자 일제는 노예라는 힘든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 휴도왕의 아들 일제가 다시 한 무제에게 공을 세움으로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한 토국의 제후가 되었다. 이즈음 김일제는 고향 알타이에서 먹던 차를 그리워하며 즐겼을 것이다. 지금도 산둥주변의 후난, 후베이, 푸젠, 안후이 등에 중국을 대표하는 차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김일제의 토국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토국은 서기 8년 한나라를 멸망하고 신(新)나라를 건국하는 주축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대륙의 실크로드와 서해와 남해를 이용하여 유럽과 인도 중국, 한반도, 왜 등과 무역을 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기 23년 신나라는 후한의 광무제에 의해 멸망되어진다. 이러한 신나라의 멸망을 전후로 하여 김일제의 후손들 중 김수로계는 먼저 서기 42년 가야를 중심으로 한 해상무역왕국을 건설하였고, 서기 65년 김알지계가 서라벌의 토착세력과 연합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김일제의 후손인 김수로와 김알지의 등장으로 한반도의 차문화는 나름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물론 1세기경의 한반도의 차문화는 김씨 왕족들의 전유물이었겠지만 적어도 한반도 안에서 자체적으로 생성된 차문화의 시작 시기와 시작배경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1세기경 신나라 멸망이후에도 가야와 신라의 왕족들은 김해 등지에 차밭을 조성하여 차생활을 즐겼을 것이며, 무역을 통해 산둥반도 주변의 고급차를 향유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일본등지에 인적교류가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러운 차문화도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통일이후 신라의 차문화는 지배층인 왕족과 승려 그리고 귀족 등이 중심이 되었겠지만 경주를 벋어나 전국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6. 문무대왕비문의 새로운 의미

문무대왕비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정말로 풀리지 않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그 의문은 도대체 누가 문무대왕비를 그토록 처참히 파손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상고사 이후 다양한 적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외침을 받으며, 때로는 굴종의 역사도 보내곤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소중히 다루고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특히 상고사를 써내려간 우리 선조들의 자랑스런 기록을 사랑해야 한다.

비록 조선 시대에는 중국에 대한 사대로 문무대왕비문처럼 소중한 우리의 상고사를 스스로 산산히 깨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또한 일본에 의한 식민문화로 광개토태왕비처럼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어 졌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소중한 우리의 상고사를 제대로 써내려가야 한다. 그래야 문무대왕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올바른 역사적 인식과 국가적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

 

김민석 박사

▶경영학 박사

▶오성다도명가연 대표

▶경남협동조합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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