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조선초 최고 책사 하륜(河崙)의 각별한 촉석루 사랑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조선초 최고 책사 하륜(河崙)의 각별한 촉석루 사랑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1.1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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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矗石樓記’에서 촉석루의 웅장한 규모와 풍취를 그려
‘충절과 예향’의 진주정신·정체성 만천하에 각인시켜
하륜의 ‘矗石樓記’ 현판
하륜의 ‘矗石樓記’ 현판.

 

고려 말에서 조선초기의 한 시대를 풍미한 문충공(文忠公) 하륜은 평생을 권좌의 주변에서 뛰어난 책사와 문신으로 살면서 숱한 정치적 경륜과 업적을 남긴 당대의 큰 인물임은 확실하다. 그 결과 그는 공신으로서 최고의 관직인 삼공(三公)의 직분을 조금의 결함이나 부족함도 없이 훌륭하게 수행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조선초기까지의 끝없는 난세를 살면서도 타고난 처세훈과 문재로써 불가사의한 정치력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태종의 뛰어난 치적(治績)인 행정체계의 정비, 호패법, 도첩제 그리고 신문고 설치 등의 전무후무한 정치개혁의 성공은 태종 주변에 항상 하륜이 있었기 때문임을 공인하고 있다.

하륜은 태종보다 6년 앞서 1416년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하륜의 부음을 접한 태종은 너무 슬퍼서 눈물을 몇 일간 흘리고, 사흘 동안 조정의 업무를 보지도 않았으며, 거의 일주일동안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사실은 그 어느 왕조에서도 찾아볼 수없는 군신지간의 모범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상기와 같은 그의 정치적 책사로서 능력과 문재로서의 대인물임을 더욱 발양광대 시키는 것이 또 있다면, 그의 특별한 백성사랑, 어른공경 그리고 고향사랑의 행적이 출중함에 후대인들은 또 한 번 크게 감동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특히 고향 진주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지극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천년의 긴 세월동안 진주와 진주정신의 상징인 진주성 촉석루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우리 진주의 정확한 정체성인 충절과 예향의 맥을 이어온 진주 촉석루를 오늘날까지도 그의 뛰어난 문필로써 만천하에 떨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촉석루의 연혁이나 역사성에 관한 다른 기록들(진양지, 동국여지승람 등)도 있지만, 그 기록들은 단지 촉석루의 신축부터 중건의 과정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을 뿐이다.

즉, 촉석루는 남쪽 남강가 벼랑위에 우뚝 솟아 남강과 벼랑이 어우러져 영남 제일의 풍광을 나타내고 있어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고려 고종 28年(1241)에 김지대(金之岱)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촉석루는 전쟁이 있을 때는 진주성의 지휘본부로 씌어졌고 평상시에는 누각으로 향시(鄕試)를 치르고 고시장(考試場)으로 활용되었다. 6.25동란으로 불타기 전의 촉석루는 국보 제276호로 지정되었다가 1960년도에 재건되고 나서 문화재 자료가 되었다.

형태는 팔작와가 다락루의 형태로 전통누각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1960년대 당시의 촉석루 재건 사업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할 정도로 대단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소중한 그 현판의 글씨가 매우 난해한 한자로 기록된바 세태의 변화에 따라 오늘날 후대인들이 그것을 제대로 읽고 해독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음이 매우 유감스럽다. 그간 전대의 몇몇 선인들께서 그의 <촉석루기>와 <촉석성문기>를 번역하고 해설한 문집이 있으나 여전히 오늘날 젊은 후대인들이 보고 읽기에는 어렵고 고답적인 용어와 형식으로 편성되어 있다. 그리고 번역한 내용 중에 매우 산만하고 애매한 부분이 적지 않게 발견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본인은 본보 10호부터 그의 <촉석루기>와 <촉석성문기>를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의 중요성과 역사성을 인식시키기 위해 보다 쉬운 평상어와 용어로 풀이하고자 한다.

그래서 우선 <촉석루기>의 앞부분 일부의 원문을 기술하고 동시에 그것에 대한 번역을 시도하며, 그 다음 <촉석루기>와 <촉석성문기> 전체 내용을 요약한 후, 앞으로 순차적이고 지속적으로 원문전체를 번역하고 해설하는 순서로 진행하기로 한다.

 

촉석루 원경.
촉석루 원경.

矗石樓記 (촉석루 기문)

樓觀之經營, 爲治者之餘事耳。然,其廢興可以見人心世道矣。世道有升降, 而人心之哀樂不同, 樓觀之廢興隨之, 夫以一樓之廢興而, 一鄕之人心可知矣。一鄕之人心, 而一時之世道可知矣。則亦豈可以餘事, 而小之哉。余爲此說者久矣。今於余鄕之矗石樓, 益信之矣。樓在, 龍頭寺南, 石崖之上。余昔少年, 登望者屢矣。樓之制, 宏敞軒豁, 俯臨渺茫, 長江流其下, 衆峯列于外, ··················。

▶ 번역:

「누관(樓觀≒樓閣)을 경영하는 것은 정치하는 자의 여사(餘事)이긴 하나 그 흥하고 폐하는 것으로써 인심(人心)과 세도(世道)를 가늠해볼 수 있다. 세도는 오르내림이 있어서 인심의 서글픔과 즐거움이 한결같지 아니하고, 누관이 흥하고 폐하는 것도 그에 따르게 된다. 대저 누관 하나가 폐하고 흥하는 것으로써 한 고을의 인심을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인심으로써 한때의 세도를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어찌 여사로만 돌리고 작게 여길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오래되었는데, 지금 우리 고을 촉석루를 보니 더욱 그러함이 믿어진다.

누는 용두사(龍頭寺) 남쪽 돌벼랑 위에 있는데, 나는 옛적 소년 시절에 여러 번 올라가 보았다. 누의 규모는 우람하고도 널찍하여 내려다보면 까마득하고, 그 밑으로는 긴 강이 흐르며 여러 봉우리는 바깥쪽으로 벌여서 있다. …················· 」

그리고 <촉석루기>의 전체 내용을 요약하면

「촉석루의 규모는 매우 크고 높아서 시야가 탁 트이는 맛이 있고, 남강을 굽어보면 긴 강이 그 아래로 흐르면서 여러 봉우리가 바깥쪽에 벌려 있다.

대나무가 그 사이에 은은하게 비치고 푸른 석벽에 긴 여울이 그 곁에 서로 잇닿아 있다.

이곳 사람의 기상은 맑고, 습관이 된 풍속은 온후하며 농부와 누에치는 아낙네는 그 일에 부지런하고, 효자와 어진 후손은 그 힘을 다 쏟으며, 심지어 날짐승들은 울고 날며 물고기와 자라는 헤엄치고 자맥질하여 한 구역의 만물에 이르기까지 제자리를 얻어서 모두가 볼만하다.

이 누대의 이름을 지은 뜻은 고려 말기의 담암(談菴) 백문보(白文寶)(1303-1374) 선생이 말하길, “강 가운데 돌이 뾰족한 까닭에 이 누대의 이름을 촉석(矗石)이라 하였다.” 이 누대는 진주목사였던 김지대(金之岱)가 짓기 시작하였고 상헌(常軒) 안진(安震)이 두 번째로 완성시켰는데, 모두 과거에 장원(壯元)을 한 분들인 까닭에 또한 장원루라는 명칭이 있기도 하다. 아름다운 제영(題詠)으로는 안진(安震)선생의 장귀사운(長句四韻)이 있고, 또 운은(耘隱) 설장수(薛長壽)선생의 여섯 절귀가 있으며 이 분들의 운자를 화답하여 계승한 이는 급암(及庵) 민사평(閔思平) 우곡(愚谷) 정이오(鄭以吾) 선생과 이재(彝齋) 허선생(許先生) 같은 분이 있다. 모두 아름다운 작품으로써 선배들의 풍류문체를 추상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고려말기에 온갖 법도가 무너지므로 변방의 수비가 또한 해이(解弛)해져서, 왜구가 쳐들어오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며 촉석루도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계사년(1413년)에 판목사(判牧事) 권충(權衷)이 판관 박시결(朴時潔)과 함께 노인들의 말을 고맙게 받아들여 강둑을 수축하되 백성을 나누어 누대를 만들고 대마다 한 무더기씩 맡겨서 농촌의 여러 걱정을 덜게 하였더니 촉석루를 짓는 역사를 도와주고 놀고 있는 자를 불러 모아서 그 힘을 다하게 하였더니 가을의 9월에 이르러 공역을 마쳤다. 높은 다락이 비로소 새로워져서 훌륭한 경치가 예전과 같이 되었다.

나도 장차 벼슬을 그만둘 날이 이미 가까워졌으니, 필마(匹馬)로 시골에 돌아와서 여러 노인들과 함께 좋은 시절 좋은 날에 이 다락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조려 즐기면서 여생을 마치고자 하나니 고을 노인들은 기다리소서.」

라고 요약할 수 있지만, 다음 11호부터는 하륜의 <촉석루기>와 <촉석성문기>을 문장별로 상세히 번역하기로 한다.

 

 

강신웅

본지 주필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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