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마지막 선비 우정 성환혁 문집 ‘우정집’ 한글 역주본 발간
진주의 마지막 선비 우정 성환혁 문집 ‘우정집’ 한글 역주본 발간
  • 김창현 수필가
  • 승인 2020.11.2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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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于亭) 성환혁(成煥赫) 선생은…
진양 수곡 사람
7세에 한말(韓末) 대유(大儒)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문하 입문
후일 회봉의 제일 고제(高弟)로 성장 ‘진주의 마지막 선비’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해동(海東) 유일의 청사(淸士)’라 격찬


■ 우정집(于亭集)에는 어떤 내용이…
면우(俛宇) 곽종석·회봉(晦峯) 하겸진 선생에게 학문을 문의한 편지
절친한 문우로 대해준 위당(爲堂) 정인보 선생과 오간 서신
진주 거창 합천 산청 하동 고성 의령 함안 선비들과 오간 시(詩)
수십 개의 비명(碑銘) 묘갈명(墓碣銘) 행장(行狀)이 실려 있어
100년 전 진주와 인근 선비들의 학문과 가문의 전통 약여하게 드러나
우정집 한글 역주본 표지와 일부 내용.
우정집 한글 역주본 표지와 일부 내용.

진주를 흔히 선비의 고장이라 부른다. 동네마다 정자가 있고 골짝마다 선비들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수많은 옛 가옥들은 종손과 종갓집 며느리가 지키고 있어 종택만은 보존된 반면 빈집으로 남은 고가들은 해마다 허물어지고 있다. 사람의 기운이 서려 있어야 보존 수명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년 2020년 가을에 진주의 마지막 선비 우정(于亭) 성환혁(成煥赫) 선생의 문집 우정집(于亭集) 한글 역주(譯註) 본이 나왔다. 문집의 내용은, 권 1에는 부(賦), 악부(樂府), 시(詩)가 수록되어 있고, 권 2에는 편지(書), 잡저(雜著), 서(序)가 정리되어 있고, 권 3에는 기(記), 발(跋), 명(銘), 찬(贊), 상향문(常享文), 고유문(告由文), 제문(祭文), 애사(哀辭)가 있고, 권 4에는 비명(碑銘), 묘표(墓表), 묘지명(墓誌銘), 묘갈명(墓碣銘) 등이 있다. 그리고 권 5에는 묘갈명(墓碣銘), 행장(行狀), 전(傳)이 수록되어 있고, 부록에 우정 공(于亭 公)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가 실려있다.

그 속에 우정(于亭)에게 남명의 학통을 전해 준, 한말 거유(巨儒) 거창 가북산(伽北山) 다전(茶田)의 면우(俛宇) 곽종석과 수곡의 회봉(晦峯) 하겸진 선생에게 학문을 문의하는 편지(書)도 있고, 우정을 '해동(海東) 유일의 청사(淸士)라고 평하고, 우정의 글을 '옛사람의 경지로 나아갔다'라고 극찬하며, 15년의 나이 차도 잊고 서울과 진주를 서로 왕래하며 절친한 문우로 대해준 위당(爲堂) 정인보 선생과 오간 서신도 있다. 또 서울의 한학자 이가원, 김범부 선생과 주고 받은 시와 글, 진주 거창 합천 산청 하동 고성 의령 함안 선비들과 오간 시(詩)도 많다. 그 밖에 수십개의 비명(碑銘), 묘갈명(墓碣銘), 행장(行狀)이 실려있어 100년 전 진주와 인근 선비들의 학문과 가문의 전통이 약여하게 드러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 우정집(于亭集)은 진주가 선비의 고장임을 밝히기 위하여, 진주시가 주관하여 출판함이 마땅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하였고, 공이 돌아가신 8년 뒤 그를 아끼던 지인들이 1973년 시문집 5권 3책으로 출판했는데, 이번에 ‘불훤계(不諼契) 우정집(于亭集) 번역위원회’(회장 成相基)가 김종진(金鐘進) 한문학 박사에게 의뢰하여 역주본을 낸 것이다.

우정집 한글 역주본에 실린 우정 성환혁 선생 존영
우정집 한글 역주본에 실린 우정 성환혁 선생 존영

남명으로 시작된 진주의 선비 계보

김우옹 정인홍 곽종석 하겸진 성환혁으로

실천궁행의 유학 정신 면면이 이어와

한글 역주(譯註) 우정집(于亭集) 발간을 계기로 한번 우리의 고향 진주의 선비 계보를 살펴보자.

율곡은 ‘퇴계의 학문은 바다와 같고, 남명은 태산과 같다’라고 했다. 퇴계 문파를 영남 좌도 문파로, 남명 문파를 영남 우도 문파라 부르는데, 남명은 실천궁행을 중요시 하여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 했다.

남명은 외가였던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났으나, 61세에 거처를 덕산으로 옮겨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산천재를 짓고 12년 살다가 1572년 세상을 떠났으나, 기개가 태산을 덮을만하였다. 그는 지리산을 '천석들이 큰 종을 보라(請看千石鐘)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非大扣無聲)'고 했고,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들이 권력을 농단하자, <단성 현감 사직소>에서 신성 불가침적인 존재인 국왕 명종과 수렴청정하던 문정황후를 '대비는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국왕은 아직 어리니 돌아가신 왕의 한 고아일 뿐입니다'라고 조선 500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담대한 상소를 올렸다.

이 대쪽같은 선비 남명 사후 20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외손녀 사위), 내암(來庵) 정인홍, 송암(松菴) 김면 등이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다. 만년에 애제자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외손녀 사위)에게 ‘성성자(惺惺子)’를 물려주고,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정인홍에게 ‘경의검(敬義劍)’을 물려주었다. 두 개의 작은 쇠방울인 성성자는 항상 허리에 차고 다니며 정신이 혼미하지 않게 일깨우던 것이며, 작은 단검(短劍) 경의검(敬義劍)은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外斷者義)라고 새겨놓았으니, 칼로 자신을 경계했던 것이다.

손녀 사위 김우옹은 1579년 일본 사신 겐소(玄蘇)가 선위사(宣慰使)로 왔을 때 사신 접대에 여악(女樂)을 금지하도록 진언하였고,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 관찰사 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함께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병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합천군 가야면 사촌리가 고향인 정인홍은 1581년(선조 14년) 서인(西人) 정철과 윤두수를 탄핵하다 벼슬을 빼앗기고 낙향한 적 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합천, 성주, 대구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영남 의병장의 호를 받았다. 1604년 남명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이때 그가 쓴 발문에서 퇴계를 비평한 것이 문제가 되어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정인홍을 규탄하였고, 퇴계 제자들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게 되었다. 1619년에 광해군의 부탁으로 상경하였으나, 영의정을 사퇴하고 물러났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합천 가야 고령의 정인홍 문인(門人)들이 화를 당하였고, 그때 89세이던 정인홍도 명나라를 배신하고 인목대비 폐모(廢母)를 주장한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한편 구한말에 거창 가북산(伽北山) 다전(茶田)에서 큰 유학자가 나왔으니, 그가 면우(俛宇) 곽종석이다. 곽종석은 원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는데, 고종이 병서(兵書)를 즐겨 읽다가 어느 날 모르는 낱말이 있었다. 측근에게 물어보니 아는 자가 없어 왕이 크게 노했는데, 이때 한 신하가 '영남 선비에 곽면우라는 이가 있는데, 박학하여 모르는 것이 없사오니, 이 사람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그래 거창 다전(茶田)에 사람을 보내어 뜻을 물어보니, '그것은 이런 뜻이고, 어느 책 어느 구절에 있다'라고 즉석에서 대답했다. 이에 고종은 면우 선생을 서울로 불러 종 1품 벼슬을 제수했다. 종 1품은 정 1품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정 2품 판서 사이 직책이다.

그 후 선생은 1905년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을 파기하고 국적(國賊)을 죽일 것’을 상소하셨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울분의 시간을 보내다가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2674자의 긴 글을 지어 137명의 선비의 서명을 받아, 문인 김창숙(金昌淑)을 상해로 보냈다. 이 글은 상해에서 영어로 번역되어 파리는 물론 중국과 기타 우방국과 국내 모든 향교(鄕校)에 우송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선생은 그해 4월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때 선생은 ‘나는 살아서 돌아갈 기약을 하지 않고 여기에 왔다. 왜 종신징역을 선고하지 않고 하필 2년이냐?’라고 항의하셨고, 그해 7월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24일 다전(多田) 여재(如齋)에서 72세로 별세하셨다.

면우의 학문을 계승한 학자가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이다. 그는 조선 중기 도덕과 문장으로 명성이 높아 대각서원(大覺書院)에 배향된 송정(松亭) 하수일( 河受一)의 11대손이다. 회봉은 27세 때 거창 다전(茶田)에 나아가 면우 곽종석을 배알하고 천인 성명(天人性命)의 진수와 성현 심학(聖賢心學)의 오묘한 진리를 체득하고 마침내 평생 스승으로 섬겼다. 다시 합천 삼가 선비 후산(后山) 허유(許愈)를 스승으로 삼아 식견을 넓히고 심학(心學)의 개발에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진주 서쪽 50리 수곡산 가운데 있는 수곡면 덕곡마을에 ‘덕곡 서당(德谷書堂)’을 세우고 학문을 가리켰으나, 문장이 당송팔대가들의 문장과 비견될 정도로 뛰어났고, 서당 편액은 백범 김구의 글씨로 이곳이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말해 주고 있다.

회봉은 주어절요(朱語節要) 10권을 편찬했으며, 다시 퇴계의 저서들을 독파하여 ‘도문작회(陶文酌海)’ 6권을 지었다. 사학(史學)에도 조예가 깊어 ‘명사강목(明史綱目)’ 18권을 저술했고, 만년에는 우리나라 유현(儒賢)의 학문과 연원을 체계 있게 정리한 ‘동유학안(東儒學案)’ 30권을 완성하였으며, 을지문덕(乙支文德), 강감찬(姜邯贊), 이순신(李舜臣) 및 남이(南怡), 김덕령(金德齡) 등 명장의 전기(傳記)를 지어 해동 명장 열전(海東名將列傳)을 저술하여 민족정신 계발에 주력하였다. 해방 후 위당 정인보 등 당대 최고의 국학자들이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을 만나기 위해서 이곳 덕곡서당을 방문했다.

1919년 스승인 면우 곽종석이 전국 유림대표(全國儒林代表)로 137인을 창솔(倡率)하고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게 되자, 회봉은 8순 노부모를 모시고 있음에도 분연히 거사에 동참, 마침내 파리장서 사건으로 인하여 수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1926년 봄에는 다시 제2차 유림단 사건(儒林團事件)에 연루되어 대구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4년 면우 곽종석의 제자 심산 김창숙이 이회영 등과 함께 중국 국민당과 교섭해 만주·몽고 접경지에 황무지를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1925년 이곳의 개간 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로 잠입해 모금 활동을 펼쳤는데, 이때 회봉은 모금 운동에 나서다 600여 명 유림들과 투옥되었다. 이를 제2차 유림단 사건이라 한다.

1946년 77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치니 많은 선비들은 국사(國士)가 세상을 떠났다 개탄하였다. 회봉의 문장에 관하여는 학자에 따라 일치하지 않으나 한결같이 높게 평가한 점에는 이론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회봉의 문장은 우리나라의 대표 고문(古文)이라 칭찬했고, 혹은 여한십가문(麗韓十家文)에 견줄 만하다 했다. 한말의 대표 문장가인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김농암(金農巖)과 장계곡(張谿谷)의 문장에 필적(匹敵)한다’ 하였다 하니 그 진가를 짐작할 수 있다.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의 수제자가 우정(于亭) 성환혁(成煥赫)이다. 선생은 7세에 회봉(晦峯) 문하에 입문하여 20세에 칠서(七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통독했고, 그간 회봉의 사위가 된 이병각(삼성 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형)과 효성 창업주 조홍제와 스승을 모시고 금강산 구룡폭포를 탐방하기도 했다. 나중에 회봉의 제일 고제(高弟)로 성장하였으니 스승과 제자 관계가 퇴계(退溪)와 기대승(奇大升)과 같은 위치였다. 그런 연유로 우정(于亭)을 진주의 마지막 선비라고 칭하는 것이다.

끝으로 하동의 작가 이병주가 밝힌 우정(于亭)의 면모를 살펴보면, 성환혁(成煥赫) 선생은 진양군 수곡면(水谷面) 사람이다. 신학(新學)을 외면하고 한학(漢學)에만 전념했는데, 한말(韓末)의 대유(大儒) 하회봉(河晦峰) 선생 동향이며 그 문하 제1의 고제(高弟)이기도 했다. 선생은 일제 때 5백 석 가량의 궁색하지 않은 가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교우 범위를 넓힐 수 있었다. 정인보(鄭寅普), 홍집(洪集) 등으로부터 친아우와 같은 사랑을 받았고, 특히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우정(于亭)에게 보낸 서한에서 ‘해동(海東) 유일의 청사(淸士)’란 표현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가히 그 인품을 짐작할 수가 있다. 혹간 우정(于亭)이 서울에 갈 때도 있었고, 위당(爲堂)이 진양 수곡(水谷)을 방문한 적도 있었으니, 그때마다 베푼 시회(詩會)의 기록 같은 것이 아직도 그 집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선생을 뵙게 된 것은 내 나이 스물 안팎 일 때인데, 일제 말기라 일본인의 서슬이 한창 시퍼랬을 무렵인데도 선생은 상투를 자르지 않고 있었다. 여름이면 모시 두루마기, 봄가을엔 당목 두루마기, 겨울에 명주 겹 두루마기에 통영갓을 단정히 쓰고 언제나 버선에 재래의 가죽신을 신은 차림으로 출입하고 있었다. 그런 차림으로 총독부 도서관, 성균관대 도서관에도 드나들었는데 한 번도 중앙이나 지방의 관현으로부터 간섭 비슷한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니, 그 풍채와 몸가짐과 준수한 외모가 너무나 청아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한다.

선생은 진주 해인대학(海印大學)에서 한문(漢文)을 강의했고, 나는 그분의 강의 시간엔 빠짐없이 참여했다. 강의는 일정한 교재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백묵 한 개만 쥐고 나와 시경(詩經) 국풍(國風)에서 시작해서, 청대(淸代) 장병린(章炳麟), 캉유웨이(康有爲)까지 걸친 폭을 전후좌우로 왕래하며 생각이 난 편편(片片)의 문장을 판서(板書)해 가면서 설(說)하셨는데, 천하 명강의였다. 한 번은 선생이 나에게 사기(史記)를 싼 무거운 책꾸러미를 가지고 왔는데, 그 마음은 나 같은 인간이나마 계발시켜 학문의 동무로 삼아보고자 한 바람 같은 것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때 내가 열을 내기만 했더라면 간혹 와서 거들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심혈을 다해 나의 길잡이 노릇을 해주셨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는 사마천의 『사기』를 가장 우수한 교사의 훈도하(薰陶下)에 읽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얻은 학력(學力)으로 중국 고전(古典)의 보고(寶庫)에 보다 보람 있게 참입(參入)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애석한 일은 유족의 말을 들으니, 선생은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북으로 납치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생의 의욕을 잃은 것 같이 쓸쓸한 만년을 보내셨다는데, 지음(知音)을 잃은 슬픔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김창현 수필가

▶진주고, 고려대 졸업

▶‘문학시대’ 수필 등단

▶내외경제신문 기자

▶청다문학회 회장, 남강문학회 부회장

▶동우대 겸임교수 역임

▶‘내가 만난 대통령’, ‘진주는 천리길’ 등 저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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