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10대구형왕1500년역사속으로]웅장 화려하지 않지만 신비로운 자태
[가락국10대구형왕1500년역사속으로]웅장 화려하지 않지만 신비로운 자태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1.2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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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고적을 담고 있어 왕산으로 불리는 산
전국에 ‘왕’이란 명칭 쓰는 산과 지명은
구형왕의 역사인 ‘왕산’ 이 유일하다

여섯번째 이야기 ‘왕의 산 王山’ <1>

왕산의 모습.
왕산의 모습.

 

구형왕은 왜 황산으로 들어왔을까?

“차마 나라가 없어지는 것을 내 눈으로 볼 수가 없어 제기와 문적을 가지고 지품천 방장산 속으로 숨어들어가니…”

가락국 선왕의 왕묘를 지키려 이곳까지 들어왔던 구형왕은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왕묘를 보존하려 했다.

원래 황산은 가락국의 옛터였으며 이미 수로왕의 고적으로 말미암아 태왕산이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왕산으로 불리어졌던 산은 겉으로 보기엔 웅장하고 기세가 등등한 산도 아니고 기암괴석의 화려한 산도 아니다. 하지만 태왕의 기운이 서린 듯 영험함이 감도는 듯 하면서 신비로운 자태를 자아낸다.

화계리에서 왕산으로 접어드는 등반길. 왕산사지로 가는 길을 택하여 산행을 시작하면, 왕릉의 돌층계가 차츰차츰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멀리 화계리 들녘이 한눈에 펼쳐지고 지리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임천과 남덕유에서 흘러오는 물이 합수하여 경호강으로 이어지는 강의 흐름은 수태극의 형국을 취하고 있다.

이내 당도한 왕산사지는 2007년 발굴 조사 후 정비를 한 적이 없어 잡목이 우거져 있고, 언덕에 올라 ‘경상남도문화재 기념물 제164호’라고 적힌 입간판을 만나고서야 이곳이 왕산사지임을 알 수 있다.

천 수백년전 보주황태왕(수로왕)의 태왕산은 300여년이 흐른 후 구형왕의 왕산이 되었고, 100여년 후 흥무대왕 김유신이 다시 가락국 후대의 역사를 새겨 넣는다. 1400여년이 흐른 후 왕산은 현재, 세계 속으로 뻗어가는 한방 약초의 고장 산청의 역사를 다시금 쓰며 세계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하는 중이다.

왕산은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웅장하지도 않고 수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산속은 아늑한 왕의 침궁이다. “가뭄에도 변함없이 맑은 물이 샘솟고 있다 하여 수정궁으로 편액하였다”는 기록과 같이 아늑한 보궁같은 이 산은 여전히 맑은 샘물이 솟아나고 있다.

전국에 ‘왕'이란 명칭을 쓰는 산은 없고 지명 또한 없다고 하며 왕의 고적을 담고 있어 왕산으로 불리어지는 산은 산청의 '왕산' 뿐이라 한다.

글쓴이 김태훈 가락국양왕덕양전 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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