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차 문화의 발상지 ‘비봉루’를 아십니까
진주 차 문화의 발상지 ‘비봉루’를 아십니까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1.2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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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정몽주가 놀던 곳, 정몽주의 후손 3만석꾼 정상진이 1939년 건립
정상진의 장남 은초 정명수가 비봉루에서 붓글씨 쓰면서 진주차인들과 교류
1969년 정명수, 박종환, 최범술, 최규진 등이 비봉루에서 진주차례회 결성
현재는 정명수의 큰 며느리인 박군자 오성다도 관장이 다도교실 열고 있어
진주차문화의 발상지인 비봉루가 방치되고 있어 문제, 진주시 관심 제고해야
한국 차문화의 발상지인 진주 비봉루.
한국 차문화의 발상지인 진주 비봉루.

비봉루는 진주 차 문화의 발상지이다.

비봉루는 비봉산 서쪽 기슭에 있는 누각으로 원래는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선생이 자주 들러 놀던 곳이라고 한다. 영일정씨 족보에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정몽주의 후손인 정상진이 1939년 현재의 비봉루를 복원했다. 정상진은 일제강점기 때 진주에서 3만석을 한 대(大) 부호이다. 수산물 유통 등으로 재물을 모은 정상진은 자신의 조상인 포은 정몽주 선생을 기려 사재를 털어 비봉루를 건립했다.

정상진이 비봉루를 건립할 당시에는 비봉루 주변을 비롯한 진주 비봉산 일대는 모두 정상진이 소유한 땅이었다고 한다. 정상진의 손자 며느리 박군자 오성다도 전수관 관장은 “진주 비봉산과 그 일대 뿐 아니라 원지까지 가는 길 동안 우리 집안 땅을 밟지 않고는 못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비봉루를 비롯한 관리사 등 약 300여 평의 땅과 건물들이 은초 정명수 선생이 돌아가신 후 큰 며느리인 박군자 관장을 비롯해 정 선생의 8남매 자식들의 공동소유로 되어 있다.

정상진의 장남이자 추사체의 명맥을 이은 것으로 유명한 서예가였던 은초 정명수 선생은 아버지가 건립한 비봉루에서 평생을 붓글씨 쓰면서 유유자적하게 보냈다. 3만석꾼 대부호의 장남으로 태어난 덕에 인심이 후했던 은초선생은 전국에서 내 노라 하는 문화인들을 비봉루에 초청했다.

박군자 관장은 집안의 소유이기도 한 비봉루에서 오성다도 교실을 열어 은초 정명수 선생이 시작한 진주다도문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박군자 관장은 집안의 소유이기도 한 비봉루에서 오성다도 교실을 열어 은초 정명수 선생이 시작한 진주다도문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당시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던 사람 중에 사천 곤양 다솔사에서 활동하던 당대의 유명인사이자 차인(茶人)이었던 최범술이 있었다. 최범술로 인해 은초선생을 비롯한 진주의 유명인사들이 차를 마시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비봉루는 진주 차인들의 집합소가 됐다. 이에 따라 1969년 이곳에서 정명수(작고), 최범술(작고), 박종환(전 대아고 교장, 작고), 최규진(영남레미콘 회장, 생존) 등이 전국에서 최초로 진주차례회를 결성했다. 오늘날 진주의 최고부자가 된 최규진 영남레미콘 회장은 당시 혈기왕성한 젊은 사업가로 정명수, 박종환, 최범술 등 당대의 유명한 어른들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총무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진주차례회의 주역들이 서울로 가서 서울차인회와 한국차인회를 만들었다. 진주의 차인회가 전국차인회의 시발점이 됐다. 이처럼 진주의 차인들이 진주를 우리나라 차문화의 발상지, 수도라고 주장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현재 진주에는 진주시청에 등록된 차인회만 28개, 미등록까지 합하면 50여개의 차인회가 활동중인 차문화가 가장 활성화 된 도시이다. 최근 들어 진주의 차인들이 진주를 차문화수도로 선포하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진주는 차 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고 현재에도 가장 많은 차인들이 활동하는 도시이다. 그런 점에서 진주는 차문화수도 선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차에 대한 이 모든 활동들이 비봉루와 정상진의 3만석 재물을 기반으로 한 은초 정명수 선생의 공로이다. 현재 비봉루에는 은초 정명수 선생의 큰며느리 박군자 오성다도 전수관 관장이 다도교실을 열어 정명수 선생의 차 명맥을 잇고 있다.

박군자 관장은 우리나라 차문화의 발상지로서 문화적 가치가 높은 비봉루에 대해 진주시가 좀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한다.
박군자 관장은 우리나라 차문화의 발상지로서 문화적 가치가 높은 비봉루에 대해 진주시가 좀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한다.

 

다음은 박군자 오성다도 전수관 관장과의 일문일답.

▲비봉루가 진주 차 문화의 발상지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서예가이신 은초 정명수 선생이 살아계실 때에 비봉루에서 진주와 인근의 문화예술인, 차인들을 초청해 차를 마시곤 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비봉루가 진주 차인들의 집합소가 되곤 했다. 이런 연유로 1969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비봉루에서 진주차례회(나중의 진주 차인회)가 발족했다. 이런 점들 때문에 비봉루를 진주 차 문화의 발상지라고들 얘기한다.

▲진주차인회는 누가 결성했나.

-당시 사천 곤양 다솔사에 계셨던 최범술 선생과 진주의 박종환 선생, 그리고 시아버님인 정명수 선생, 김창문 선생 등이 진주차례회(나중에 진주차인회로 개명)를 만들었다. 당시에 40대 초반으로 열정적으로 사업을 하고 계셨던 영남레미콘의 최규진 회장이 총무를 맡아서 이들 어른들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곤 했다고 한다.

▲진주 차인회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나.

-진주에는 진주차인회 뿐 아니라 시청에 등록된 차인회만 28개이고 등록하지 않은 차인회까지 포함하면 약 50여개의 차인회가 활동하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차인회가 활동하고 있어 진주가 차문화의 메카임은 분명하다. 이런 모든 활동들이 처음에 비봉루에서 시작됐다. 그래서 비봉루가 우리나라 차문화 역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은 비봉루가 진주시를 비롯한 당국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어 안타깝다.

▲비봉루는 현재 누구 소유인가.

-비봉루는 저희 시 할아버님이신 정상진 선생이 1939년도에 사재를 털어 건립한 누각이다. 설립할 당시는 비봉루 주변이 모두 정상진 선생 소유의 땅이었다. 지금은 누각과 관리사를 포함해 현재 약 300여 평 된다. 비봉루는 진주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이곳에서 바라보는 진주 시가지 전경이 일품이다.

▲비봉루는 문화재가 아닌가.

-현재 비봉루를 포함한 관리사 등은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반인들은 문화재이다 보니 국가나 지자체 소유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비봉루를 포함한 관리사 등은 은초 정명수 선생의 8명의 자제들이 공동으로 소유한 개인재산이다.

▲정상진 선생이 비봉루를 건립한 동기는 무엇인가.

-영일정씨 족보에 고려말 충신인 정몽주 선생이 비봉루에 올라 놀았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본 저희 시 할아버님인 정상진 선생이 집안과 유래가 있는 비봉루를 건립한 것이다. 당시 정상진 선생은 쌀 3만석을 할 정도로 진주에서 대(大) 부호였다. 그런 부자였기 때문에 사재를 털어 비봉루를 건립하셨던 것으로 안다. 당시 비봉루 주변 뿐 아니라 진주의 진산인 비봉산을 비롯해 이 인근 일대가 모두 정상진 선생댁 땅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자식들이 다 팔아먹고 비봉루 일대만 소유권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할아버님인 정상진 선생은 무엇을 해서 그렇게 많은 재물을 갖게 되었나.

-일제 강점기 등에 명태유통 등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고 들었다. 제가 시집오고 나서 보면 아침마다 주먹밥을 싸서는 집현면, 정촌면 등 산지 사방으로 머슴들을 보내 아침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정상진 선생이 부자이긴 했어도 그리 인심을 잃고 살진 않았던 것 같다.

▲비봉루가 유명해진 것은 정몽주 선생 때문이라기보다는 은초 정명수 선생이 여기서 붓글씨를 쓰셨기 때문 아닌가.

-그렇다. 대부호의 장남으로 태어나 진주에서는 유명한 서예가이신 은초 정명수 선생이 평생을 비봉루에서 붓글씨를 쓰시면서 전국의 문화예술인들과 교류를 하셨다. 소의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인 이중섭 선생도 비봉루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또 이웃해 있는 진주고등학교 학생들이나 진주여고 학생들을 위해 백일장도 열고, 시나 시조도 가르치고 하셨다. 은초 선생이 부자 집안의 장남이다 보니 인심도 후해 문화예술인들이 늘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비봉루가 유명해졌다.

▲현재는 박군자 관장이 집안의 다도를 계승하고 있는가.

-집안의 다도라기보다는 오성다도 전수관 관장을 맡고 있다. 오성다도는 대아고등학교 교장으로 유명한 박종환 선생이 1981년 창안한 다도이다. 제가 전수자 자격을 갖고 있다.

▲오성다도란 무엇인가.

-사람에게는 신성, 영성, 족성, 개성, 감성 등 오성이 있다고 보고 다도를 통해 이들 성품이 잘 발현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언제부터 박 관장이 오성다도를 하고 있는가.

-1998년부터 시작했으니 20년이 넘었다. 여기 비봉루에서도 교육을 하고 있고 교육대학이나 과기대 등에서도 하고 있다. 현재 교육받은 사람이 약 500명이 넘는다.

▲최근 진주를 차문화수도로 선포하고 기념하자는 움직임들이 있다.

-진주는 여기 비봉루에서 시작된 차문화의 발상지이다. 전국에서 최초로 진주차인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던 곳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차인회가 제 역할을 못한다. 그렇다 보니 안타까운 마음에서 진주를 차문화수도로 선포해 차문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알리자는 움직임이 있다.

▲한국차문화수도가 되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는가.

-진주차문화관을 설립해 차에 대해 세계에서 누가 오더라도 차에 대해 체계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또 진주가 차문화 발상지인데 차밭 등이 제대로 정비돼 있지 않다. 이런 것들도 좀 정비하자는 그런 운동이다. 또 비봉루도 우리 개인이 운영하다 보니 부족한 것들이 많다. 비봉루에 대한 관심 등도 좀 더 높아져야 할 우리나라의 차 문화자산이다.

▲진주시에서 비봉루에 대한 관심을 쏟지 않고 있나.

-그렇다. 비봉루가 경남도 문화재이다 보니 진주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예를들면 문화재인 비봉루 앞에 동네 운동시설이 들어서 있다. 또 이들 운동하는 사람들을 위해 비봉루 정문 앞에 화장실을 만들어 놓았다. 이런 것들은 문화인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통탄할 일이다. 우리나라 차 문화의 발상지로서 문화적 가치가 높은 비봉루에 대해서도 진주시가 좀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황인태 본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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