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서 9번째 ‘판소리 페스티벌’ 연 박추자 명창
진주서 9번째 ‘판소리 페스티벌’ 연 박추자 명창
  • 경남미디어
  • 승인 2018.11.16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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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촉석루가 있어 원래 판소리의 중심도시
판소리 페스티벌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 매우 커
젊은이들 판소리 배우려는 열정 많아 미래 밝아
44년 전에 진주 봉곡동에 정착, 진주 제2의 고향
박추자 판소리 명창은 진주에서 9회째 ‘판소리페스티벌’을 개최해 오고 있다.
박추자 판소리 명창은 진주에서 9회째 ‘판소리페스티벌’을 개최해 오고 있다.

전주도 아니고 서울도 아닌 진주에서 판소리 부활을 외치며 ‘판소리 페스티벌’을 9회째 열고 있는 명창이 있다. 박추자 명창이다. 박 명창은 53년 전남고흥의 국악명가에서 태어나 7살 때부터 소리를 배웠다. 집안이 우리나라 최고의 국악명가인데 언니는 판소리의 박양덕 명창이고 형부는 거문고 문화재이다. 조카인 김성혁은 아쟁, 김미선은 거문고를 하고 있다.

박 명창은 그런데 22살 때 후원자의 권유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진주에 자리 잡아 44년째 진주와 이웃 산청을 오가면서 판소리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박 명창의 활동으로 우리나라 동편제판소리 계에서는 경남의 인맥이 제일 튼튼하다고 한다.

진주에서 ‘판소리페스티벌’을 여는 이유는 원래 진주가 귀곡성의 중심일 정도로 판소리가 활성화 돼 있었으나 현대에 들어와 점차 그 명맥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 해서이다. 그래서 박 명창이 중심이 돼 그 후학들과 함께 올해로 9번째 판소리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요즘은 유투브등 디지털 소통의 활성화로 우리 소리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많아 판소리 페스티벌을 열고 유투브등에 동영상을 올리면 세계인들의 호응이 대단하다고 한다.

또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판소리를 배우려는 열정도 많아 앞으로 소리의 전성기가 다시 도래하게 될 것이라고 박 명창은 내다보고 있다. 진주에서 판소리 페스티벌을 열고 있는 박명창을 만나 그의 인생과 소리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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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서 ‘판소리 페스티벌’을 9회째 열었다. 진주에서 여는 이유가 있나.

△진주를 비롯한 경남은 일반인은 잘 모르지만 판소리의 중심이다.

-진주가 아닌 전주가 판소리 주 무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일반 사람들은 아직도 전주가 판소리의 주 무대 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진주를 비롯한 경남 출신들이 판소리 분야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판소리는 섬진강을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서편제, 동쪽으로는 동편제라고 한다. 진주, 산청은 동편제의 중심이다. 그래서 진주서 동편제 부활을 위한 판소리 페스티벌을 열고 있는 것이다.

-진주에도 판소리의 역사가 있나.

△그렇다. 진주가 한때는 귀곡성의 중심지였다. 촉석루에 대한민국 최고의 명창이 안다녀간 사람이 없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 우리 것을 버렸다. 그러다 제가 와서 살살 판소리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판소리페스티벌’에 대한 대중의 호응이 어떤가.

△그렇다. 어떤 경우에는 관객이 차서 다 못 들어오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대중의 호응이 좋다. 올해가 9회째인데 앞으로 ‘판소리 페스티벌’은 무궁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판소리에 대한 대중의 호응이 좋다는 말인데 실제로 그분야가 발전하고 있나.

△그렇다. 우리가 공부하던 시절하고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우리 것에 대한 이해도와 사랑이 높고 공부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시절에는 판소리가 묻혀있어서 판소리 하는 게 참으로 힘들었다. 생활이 안돼서 기방 집에서 소리하고 밥 얻어먹고 그랬다.

-지금은 다른가.

△지금은 판소리가 땅속에 있던 것이 반쯤은 나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대회도 많고 학생들도 배우려는 열정이 대단하다.

-이렇게 된 이유가 있는가.

△초중학생들은 판소리 대회에 나가 장관상 등을 받으면 예술고등학교 진학이 쉽고 고등학생들은 상을 받으면 대학에 수시로 합격을 할 수 있다. 그런 제도가 정비돼 있는 점과 정부의 활성화 정책들이 효과를 내면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도 대중의 호응이 없으면 생활이 어려울텐데.

△지금 판소리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활이 어렵지 않다. 유투브 등을 통해 우리 소리가 전세계에 바로 알려질 수 있고 세계인의 관심도 많아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다. 또 판소리를 다른 음악장르에 접목하려는 시도들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조금 지나면 판소리가 완전히 땅위로 솟구칠 날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박 명창이 동편제의 최고 원로인가.

△스승과 선배들이 다 작고하시고 그랬기 때문에 지금은 제가 제일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한다.

-판소리를 동편제, 서편제로 나누는 이유가 무엇인가.

△소리의 기법이 좀 다르다. 동편제는 활발하고 우렁차다. 서편제는 애절하다. 동편제는 남자에 비유되고 서편제는 여자로 보면 된다.

-선생은 언제부터 소리를 시작했나.

△저는 전남 고흥의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7살 때부터 언니와 함께 소리를 배웠다.

-어디서 배웠나.

△집에서 선생을 모셔 와서 배웠다.

-언니는 누구인가.

△언니도 소리를 하는 데 박양덕 명창이다. 형부는 거문고의 대가인 김무길 선생이다.

-집안에서는 누구누구가 국악을 하나.

△언니와 저 뿐 아니라 조카인 김성혁(아쟁), 김미선(거문고) 손재영(판소리) 등이 국악을 하고 있다. 우리집안이 우리나라에서는 최고의 국악집안이라고 자부한다.

-그럼 선생은 제도권 교육은 받지 않고 소리공부만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제도권 교육은 중학교까지 다녔고 그 이후에는 소리공부를 사사하면서 배웠다.

-본격적으로 소리활동을 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18살 때 군인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제가 30살 때 남편이 돌아가셨다. 그 이후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고 보면 된다.

-전남고흥에서 태어나 진주에 온 것은 언제인가.

△44년 전인 22살 때이다.

-어떤 인연으로 진주에 오게 됐나.

△산청출신의 후원자가 250년 된 거문고를 줄 테니 산청에서 후학들을 양성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산청 길리에 있는 집에 갔다. 다락방에 있는 250년 된 거문고를 보고는 그것이 탐이나서 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는 당시는 부산에 살았는데 40일 동안 부산 집을 정리하고 산청에 왔더니 거문고가 없어졌더라.

-거문고를 후원자가 숨겼나.

△그런 건 아니고 당시 후원자의 집에 갈 때 몇 명이 갔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이 몰래 가져간 것 같더라.

-그럼 산청에 오지 않아도 되지 않나.

△이미 마음을 정했고 집도 정리를 해서 그럴 수 없었다. 진주에 오니 남강의 애환 등이 제 가슴에 새겨지더라. 진주가 좋았다. 그래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지만 진주로 왔다. 처음 와서 진주 유곡동에 집을 얻고 살았다. 그게 22살 때인 44년 전이다. 참으로 세월이 빠르다. 제가 진주에 산 것이 고향인 고흥에 산 시간의 몇 배가 됐다.

-지금 연수원은 어디에 있나.

△산청 길리에 있다. (사)한국전통문화예술보존회의 이름으로 연수를 한다.

-학생들은 얼마나 되나.

△전문으로 배우는 학생들이 60여명, 비전문이지만 열심히 배우는 사람들이 40여명 정도된다.

-그 정도면 많은 건가.

△더 배우려고 하지만 이정도 이상은 저도 힘들다.

-명창은 언제 됐나.

△2003년 남원 춘향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판소리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면 명창이라는 칭호를 쓸 수 있다.

-그럼 명창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닌가.

△그렇다. 아무리 잘해도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지 않으면 명창이라는 칭호를 쓸 수 없다. 엄격한 기준이 있다.

-요즈음은 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전국의 주요대회에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산청남사출신인 기산 박헌봉 선생 기념사업인 박헌봉 전국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목화를 우리나라에 가져온 문익점 선생 민요대회도 9회까지 하고 있다. 진주에서 판소리페스티벌 대회 9회째 하고 있다.

-30세에 혼자가 되었는데 재혼은 하지 않나.

△동편제는 성격이 활달하고 왈가닥이다. 제 성격도 소리를 닮아서 그렇게 변했다. 그래서 남자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친구는 왜 못 사귀나.

△소리를 너무 많이 하니까 평소에는 사람을 만나서 말을 잘 안 해. 그러니 친구가 잘 안생겨. 그런데 사실 예술을 하려면 남편이 없어야 된다. 남편수발하고 애교도 있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다 하나. 그러니 어느 남자가 좋아하겠어. 부인이 애교도 좀 부리고 해야 하는데. 남편은 없어도 남자친구는 있으면 좋겠어.

-그래도 소리 좋아하는 남자들이 친구는 할 것 같은데

△제가 예쁘지는 않지만 술도 좋아하고 소리도 잘하니까 친구가 되면 남자들이 손해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술도 겁 없이 먹고 성격이 왈가닥이어서 겁이 나서 도망가는지 아직 남자친구가 없어.

황인태 본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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