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진주에서 경치가 좋기로는 촉석루가 제일이니…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진주에서 경치가 좋기로는 촉석루가 제일이니…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2.22 14: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주출신 하수일도 촉석루 중수를 詩文과 함께 撰하다
고려조 건립이래 수차례 중수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
詩文을 덧붙여 촉석루의 중수과정과 그 위용을 노래
촉석루.
촉석루.

지난 제14호에 이어 본 호에서도 지금도 여전히 촉석루 경내에 현판으로 걸려있는 ‘촉석루 중수·중건기’ 세 개의 현판 중 두 번째의 현판인 松亭(송정) 하수일(河受一)의 중수기에 대해 본문의 번역과 함께 중수의 과정은 물론, 촉석루의 역사적·문화재적 가치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촉석루 중수기’를 찬(撰)한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에 대한 인물론을 살펴보자.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태이(太易), 호는 송정(松亭), 고려 명신 하공진(河拱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하면(河沔)이며, 어머니는 함안 조씨 조정수(趙廷竪)의 딸이다. 부인은 파평 윤씨 윤언례(尹彦禮)의 딸이다.

그는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받들어 어버이의 마음이 기쁘지 않을 때에는 뜰에 내려가서 엎드려 절하여 노여움이 풀린 뒤에야 물러났다. 또한 형제끼리 함께 거쳐하는데 그가 혹시 아우들을 책망하면 두 아우가 모두 엎드려 감히 변명하지도 못했다.

만년에 학문을 연마하며 후학을 양성하면서 지내다 1612년(광해군4년)에 별세하였다.

그는 남명(南冥)과 각재(覺齋:河沆) 뿐만 아니라,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수우당은 스승인 남명의 기질을 그대로 닮아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말미암아 결국 간신들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생을 마친 선비이다.

이러한 송정의 뛰어난 문장과 기개는 한말 대학자이며 문장으로 이름난 회봉(晦峰) 하겸진(河謙鎭)에게 이어져 그 빛을 발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1581년 단성현감의 부탁을 받아 ‘단성향교성전중수기’를 지었고, 이후 ‘德川書院洗心亭記’, ‘수우당명(守愚堂銘)’, ‘촉석루세심정기(矗石樓洗心亭記)’, ‘矗石樓重修記’등을 지었다. 문집으로는 ‘송정문집(松亭文集)’이 남아있다.

그는 현재 경남 진주시의 대각서원(大覺書院)에 제향(祭享)되어 있으며, 낙수암과 사적비가 있어 송정의 유덕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진양지(晉陽誌) 권3 ’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라 있기도 하다.

이어 그의 ‘矗石樓 重修記’의 본문과 역문(譯文)을 기술하여 촉석루의 역사적 의미와 문화적 가치를 조명하고자 한다.

矗石樓 重修記(원문)

聞諸柳柳州 賢者之興 而愚者之廢 廢而復之爲是 習而循之爲非. 吾以爲名言. 在古則於滕王閣得王弘仲, 岳陽樓得滕子京,咸擧其廢者而復之. 玆果爲賢者歟.在今則我侯申公有之矣. 矗石晉陽名樓也.

在麗朝 金公仲光與其別駕李仕忠 始城而作之 厥後連爲焚蕩 廢興無常 至弘治四年辛亥 慶侯紝與其判官吳致仁 又重修今九十有三載 歲月旣久 棟絶柱敧 不克以居由是凡大賓 旅大宴遊 常萬客舍 然而歷累 侯咸以時 屈莫能擧 及至我侯與方伯柳公 謨新斯樓 克恢舊規時萬曆十一年契米春二 月也. 樓制五間 棟凡六 闊三十有八尺 柱凡五十 高一仞.

---중 략---

判官 金公元龍相協力以成 系之以詩曰 (이하 詩文 생략).

<상기 원문 역문>

당(唐)나라 유종원(柳宗元)은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현명한 사람은 흥하니 일으켜 세우고, 어리석은 사람은 망하니 쓰러지게 버려둔다고 하였다. 한번 망하여 없어진 것을 다시 복구하는 일은 옳은 일이고, 그대로 내 버려두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이 말을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옛날에 등왕각(滕王閣)을 왕홍중(王弘中)을 만나고, 악양루(岳陽樓)는 등자경(滕子京)을 만났으니, 이 두 사람은 허물어진 두 누각을 다시 수리하여 복구하였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은 과연 참으로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우리 고을을 다스리는 제후(諸侯)로서 신공(申公)이 있다. 촉석루는 진주에서 유명한 누각이다.

고려 때에 김중광(金仲光)이 그의 부하인 이사충(李仕忠)과 함께 성을 쌓고 촉석루를 지었다. 그 뒤에 불타 버리면 다시 짓고, 지어 놓으면 또 타서, 몇번이나 되풀이 되더니, 홍치(弘治) 4년(辛亥:1491)에 진주 목사인 경임(慶紝)이 그의 부하인 판관 오치인(吳致仁)과 같이 진주 촉석루를 중수하였다. 지금은 그로부터 세월이 93년이나 지나서 오래되었으니 들보가 부러지고, 기둥이 기우러 사람이 이용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손님을 접대하는 것과 큰 잔치는 언제나 객사(客舍:왕명을 받고 지방에 내려 온 벼슬아치를 접대하던 곳)에서 치렀다. 그 뒤 목사가 여러 번 바뀌었으나, 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촉석루를 고치지 아니 하였다.

이번에 새로 온 목사가 방백(方伯:지금의 도지사)류공(柳公)과 이 누각을 중수할 것을 상의하고, 옛날 규모 보다 크게 확장하여 새로 중수를 하였다. 때는 만력(萬曆) 11년(癸未:1583) 봄 2월이다.

---중 략---

판관(判官) 김원룡(金元龍)과 서로 협력하여 이 누각을 완공하였다.

이어서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진주에서 경치가 좋기로는 촉석루가 제일이니,

터를 잡아 처음 지은 것은 고려 시대이다.

임금님 사신(使臣) 보내면 여기서 맞이하고,

손님 오면 여기서 접대하였네.

그 쓰임새 많아서 노는 장소만 아니었기에,

목사님 새로 오시면 무너진 것을 수리했다오,

지난 홍치(弘治)때에 경(慶)목사가 중수하였기에,

손꼽아 세어보니 93년이 지났네.

수십년이 지나서 기둥이 기우러져서

우리 목사께서 중수 할 것을 걱정하자,

방백의 명령으로 중수를 시작하니,

우리 목사께서 일꾼들에게 잘 하라고 타이른다.

너희들이 옛날 법도를 본받아 잘 하라 하니,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재목을 재빠르게 나르고,

구당(瞿唐)의 급류도 잔잔한 듯 삼협(三峽)의 험로도 좋은 듯,

도끼로 치고 톱으로 잘라 단숨에 다 지었네.

우뚝하고 웅장하며 날렵하고 반듯한데,

옆에는 송죽(松竹)이 무성하니 새가 날 듯 화려하고,

남쪽에는 큰 강이 힘차게 흘러가는데,

방백이 놀러오니 용장(龍章)깃발 펄럭인다.

---이 하 (三聯詩文) 생략---

만력(萬曆:중국 연호) 계미(癸未:1583) 11년 2월

진양(晉陽) 하수일(河受一) 적음.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대로 988, 4층 (칠암동)
  • 대표전화 : 055-743-8000
  • 팩스 : 055-748-14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선효
  • 법인명 : 주식회사 경남미디어
  • 제호 : 경남미디어
  • 등록번호 : 경남 아 02393
  • 등록일 : 2018-09-19
  • 발행일 : 2018-11-11
  • 발행인 : 황인태
  • 편집인 : 황인태
  • 경남미디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미디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7481400@daum.net
ND소프트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이선효 055-743-8000 74380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