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1960년 중건기는 수곡출신 성환혁 선생이 남겨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1960년 중건기는 수곡출신 성환혁 선생이 남겨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2.28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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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 선생이 ‘해동 유일의 청사(淸士)’라 표현한 선비
6.25때 불타버린 촉석루의 모습과 아픔을 자세히 기술
촉석루 중건에 크게 공헌한 ‘진주고적보존회’ 등에 감사

<16> 진주성 촉석루 시문 현판 고찰

촉석루.
촉석루.

1241년 촉석루가 처음 건설 된 후, 1583년 11월에 촉석루 重修(중수)를 완료하면서 晉陽 하수일(河受一)선생께서 ‘촉석루 중수기’를 남겼고, 이어 1725년 首陽 정식(鄭栻)선생께서 ‘촉석루 중수기2’를 남겼으며, 이어 근세에 이르러 6.25때 전소된 촉석루를 다시 중건하면서 1960년에 昌山 성환혁(成煥赫) 선생께서 ‘촉석루 중건기’를 남겼다.

상기 모든 기록들이 현재 촉석루 경내에 뚜렷한 현판으로 걸려있다. 이미 본지 14호와 15호에서 하수일의 ‘촉석루 중수기’와 정식(鄭栻)의 ‘촉석루 중수기2’에 대한 원문과 역문, 그리고 진주 문화사적 가치와 작가들의 행적과 그들의 지극한 진주사랑 정신에 대해서 기술했다.

본 16호에서는 1960년에 창산(昌山) 성환혁(成煥赫) 선생에 의해 제작 기록된 ‘촉석루 중건기’에 대해서 원문과 번역문을 작가의 행적과 함께 기술하고자 한다.

성환혁(成煥赫:1908-1966) 선생은 진양군 수곡면 효자동 정협(井埉)에서 출생했다. 그의 자(字)는 사첨(士瞻)이요, 호는 우정(于亭), 관행(貫行)은 창령부사 성여신(成汝信)의 12대 손이다. 7세에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문하에 입문하여 20세에 칠서(七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통독했고, 진주농과대학과 해인대에서 한문학 강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창산(昌山) 성환혁 선생은 진주의 마지막 선비로써 한말 큰선비 하회봉(河晦峯) 선생과 동향으로, 그 문하 제일의 고제(高弟)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퇴계(退溪)와 기대승(奇大升)과 같은 위치였다. 성환혁(成煥赫) 선생의 집안은 일제 강점기 하에서도 5백석 가량의 가산을 가지고 있었고, 정인보와 홍집 등으로부터 친아우 같은 사랑을 받았다. 성 선생이 서울에 가기도 했고, 정인보 선생이 진양의 수곡 성 선생댁을 방문하기도 하여, 그때마다 시회(詩會)를 베풀기도 했다.

그는 또한 민족주의 사상이 투철하여 일제 강점기하에 상투도 결코 자르지 않고, 여름에 전통적인 모시 두루마기, 봄·가을엔 당목 두루마기, 겨울엔 명주 겹두루마기에 통영갓을 단정히 쓰고 언제나 버선에 재래의 가죽신을 착용한 차림이었다. 이런 차림으로 총독부 도서관, 성균관 도서관을 드나들었는데, 단 한 번도 관헌의 간섭을 받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그의 풍채와 몸가짐, 그리고 그의 준수한 용모 때문이기도 했다. 위당(爲堂) 정인보 선생이 그에게 보낸 서한(書翰)에 ‘해동 유일의 청사(淸士)’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니 가히 그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문집으로는 ‘于亭集’이 있는데, 이 문집은 성환혁 선생께서 생전에 기록했던 시문들을 모아 묶은 문집으로, 서문과 발문(跋文)은 따로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현존하는 두 판본은 각각 1961년, 1973년에 출간되었다. 5권3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판본은 신활자본(新活字本)이며, 선장(線裝)이며, 발행처는 알 수 없다. 문집의 구체적인 내용은, 1권에는 부(賦), 악부시(樂府詩)가 수록되어 있고, 2권에는 서(書), 서(序)가 정리되어 있고, 3권에는 기(記), 발(跋), 명(銘), 찬(贊), 상향문(常享文), 고유문(告由文), 제문(祭文), 애사(哀辭)가 있고, 묘표(墓表), 묘지명(墓誌銘), 묘갈명(墓碣銘)등이 있다. 그리고 5권에는 행장(行狀), 전(傳)이 수록되어 있다.

이제 그의 많은 시문(詩文)들 중에서, 1960년에 촉석루를 중건하고 난 후, 6.25때 불타버린 촉석루의 아픔을 자세히 기술하고, 동시에 촉석루 중건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이어 중건에 크게 공헌한 ‘진주고적보존회’와 도청과 국가의 적극적 협찬에 대한 고마움도 표시하기도 했다.

그의 ‘촉석루 중건기’의 원문과 역문(譯文)을 살펴보면,

矗石樓 重建記 (원문)

嶺之南號多山水樓臺之勝 而晉州爲其第一名聞於國中 以有矗石樓故也.

樓在州城址上 自城址而不一里 有獨岡 逶迤東鶩 乍斷復起若龍之頭而 止其前 卽爲樓之境 而古所稱龍頭埠者也. 由此以望之 山之或近或遠 爲此擁護之勢 而高以北臨者其名飛鳳 水之若束若放 爲此繞圍之態 而緩以東流者其名藍江 江之岸被之以竹 極茂翳 西南側曠野四腴 參差如畵.

而至岸壁草樹 汀洲煙霞 其景狀朝暮變化而春秋不同 觀是眞天造地設 閱千萬歲之一大絶景. 以資今古 四方人客之所 遊賞讌嬉 宜其爲嶺南第一形勝 而名聞於國中者也.

---下 略---

歲 庚子 小春節 昌山 成煥赫 記

(역문)

영남에는 산수경관이 좋은 훌륭한 누대(樓臺)가 많아서 유명한 곳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진주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하게 된 것은 촉석루가 있기 때문이다.

촉석루는 진주성지 안에 있다. 성지로부터 채 일리(一里)도 안 되는 곳에 높은 언덕이 하나 솟아서 구불구불 이어서 동쪽으로 달려가다가 갑자기 끊어졌다가는 용머리와 같은 생김새가 다시 일어나서 멎은 바로 그 앞이 촉석루가 서 있는 경계이다.

이렇기 때문에 예부터 여기를 용머리 언덕이라고 부른다. 이 성지에서 바라보면 멀고 가까운 산들이 이 성지를 감싸고 보호하는 형세를 하고 있다. 북쪽에 다다라 높이 솟아 있는 산 이름이 비봉산(飛鳳山)이다. 물이 이 성지를 에워싸고 흐르는 모양새가 좁아졌다가는 넓어지면서 천천히 동쪽으로 흘러가나 이 강 이름을 남강(藍江)이라고 한다. 강 언덕에는 대나무 숲이 아주 무성하게 우거져 하늘을 가린 것 같고, 서남쪽 넓은 들판은 사방이 기름진 땅이고 들쭉날쭉한 것이 마치 그림 같다.

그리고 절벽에는 풀과 나무가 나 있고 모래섬에는 안개가 서리는데 그 모양새가 아침 저녁이 다르고 봄 가을이 같지 않으니 이것이야 말로 하늘의 조화(造化)로 땅이 만들어 천만년을 이어 갈 볼거리를 펼쳤으니 하나의 큰 절경(絶景)이로다.

이러한 볼거리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사방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놀면서 이것을 감상하고 이야기 하며 즐기고 기뻐하니 이곳이 당연히 영남에서 제일 좋은 명승지가 되었고 그 이름이 전국에 소문이 나게 되었다.

---하 략---

경자(庚子;1960)년 소춘절 창산(昌山) 성환혁(成煥赫) 적음.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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