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진주의 아름다운 산천은 영남에서 제일이다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진주의 아름다운 산천은 영남에서 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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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0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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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 李仁老·金之岱 뛰어난 문필로 진주 전국에 알려
이인로 저서 파한집 첫 장에서 빼어난 진주 경관을 노래
김지대 진주목사 시절 作詩…문헌상에 나타난 최초의 시

<17> 진주성 촉석루 시문 현판 고찰

진주성내에 세워진 이인로의 시문판
진주성내에 세워진 이인로의 시문판

“晉陽溪山勝致, 嶺南第一”

“진주의 아름다운 산천은 영남에서 제일이다”

상기 시문은 현재 진주 촉석루 계단 앞에 설치되어 있는 시문판에 기록된 내용이다. 사실상 기록으로 전하는 진주 최초의 시로써 짧지만 진주를 예찬한 최초의 시문이라고 볼 수 있다.

본 시문은 고려조 최고의 문인 이인로(李仁老)가 그의 저서 ‘파한집(破閑集)’의 첫 장에 실었다.

이인로는 고려중기의 시인이며 수필가이자 뛰어난 평론가로 자(字)는 미수(眉叟)이며, 호는 쌍명재(雙明齋)로 고려시대에 자연을 벗삼아 은둔과 풍류를 즐겼던 죽고칠현(竹高七賢) 중의 한 분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 시와 술을 즐겼던 사람으로 한때 무릉도원 청학동을 찾아 안주(安住)하고자 지리산에 들렀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 진주 경관의 빼어남을 노래했다.

이인로는 고려 3대 명문가의 하나였던 경원이씨(慶源李氏)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자 화엄종의 승통으로 최고법계에 오른 요일(寥一)이 거두어 키우면서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이인로가 뒤에 잠시동안 불가에 귀의하게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인로가 19세 되던 1170년은 정중부, 이의방 등이 난을 일으켜 문신들을 대량학살 하는 등 고려는 일대 혼란에 빠져든다.

문장가의 기질을 타고났던 이인로는 무인들의 세상을 등지고 불자가 되고 만다. 이 후에 나라가 안정되자 다시 속세로 돌아와 1180년 진사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문필가로 활동하게 된다.

구인환이 번역한 파한집에서 이인로가 8~9세 때 노 선비에게 글을 배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있다. 노 선비가 경구(警句)를 가르쳐 주겠다며 “꽃은 난간 앞에서 웃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고, 새는 수풀아래서 우나 눈물을 보기 어렵도다”라고 하자, 이인로는 “벼들이 문밖에서 찡그리나 뜻은 알 수 없다”고 하며, “말은 그럴 듯하나 깊은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답하여 노 선비가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또한 이인로는 “신분이나 빈부귀천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이 문장이다”고 하여 문학에 관한 한 만인평등사상을 가졌던 인물이다. 이인로의 별명은 ‘복고(腹藁)’였다고 한다. 배속에 원고를 담고 있다는 뜻의 ‘복고’라는 말은 원래 당나라의 유명한 문필가 왕발의 별명이었다. 왕발은 글을 짓기 전에 우선 먹을 갈아놓고 술을 마신 다음 한숨자고 일어나자마자 글을 써 내려갔는데 한자도 고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명저인 파한집(破閑集)은 제목이 뜻하는 것처럼 ‘한가로움을 깨뜨리다’라는 뜻으로 이인로의 사상과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이다. 그는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자연 속에서 은둔하며 온전한 한가로움을 얻음은 장기·바둑 두는 일보다 낫기에 ‘파한’이라고 이름 붙인다고 하였다한다. 또한 그는 그 시대의 유명한 시작품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시를 삶의 정수로서 사랑하고 음미하면서 많은 다른 사람이 쓴 시화를 기록하고 자신이 쓴 것도 남겼는데 이를 책으로 펴낸 것이 파한집이다. 파한집은 그의 사후 40년이 지난 1260년에 발간되었으나, 초간은 전해지지 않고 1659년에 발간한 것이 남아있다.

그리고 지금도 진주 촉석루 정문의 우측 구석 담벽에 아래와 같은 시문이 쓰여 있는 시판이 있는데,

奇尙州牧伯崔學士滋

去歲江樓餞我行

작년에는 강루에서 진주로 떠나는 나를 배웅하더니

今年公亦到黃堂

금년에는 그대도 역시 목사가 되었구려.

曾威管記顔如玉

전에는 그대의 얼굴이 옥같이 고왔지.

復作遊頭鬂未霜

우리 더 늙기 전에 다시 한 번 놀아봄세.

洛邑溪山雖洞府

상주의 산천이 비록 좋은 줄로 알지 마는

晋陽風月亦仙鄕

그래도 진양의 풍광이 신선의 고향이라네

兩州歸路閒何許

두 고을은 길이 멀어 만나기 어려우니

一寸離懷久已傷

잠시 한 번 헤어지면 이별의 아쉬움이 오래 가지.

欲把琴書尋舊要

거문고 책 뒤져 좋은 옛 노래 찾아가며

況看簾幕報新凉

가을에 염막에서 놀아봄이 어떠랴.

嗟公虛負中秋約

안타깝게도 추석에 만나자는 약속은 어겨졌으니

更約重陽飮菊香

이번 중양절에 국향주를 마시러 다시 약속하세.

위의 시에서 ‘낙읍’은 상주의 옛 이름이며, ‘풍월’은 자연경치를 뜻한다. 김지대는 진주를 선향(仙鄕)으로 표현하면서 상주의 ‘계산’보다 진주의 경치가 뛰어나다고 했으니, 이 시는 진주의 자연을 예찬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양절’은 홀수의 달과 날짜가 겹치는 날이며 특히 음력 9월9일을 뜻하는데, 고려 때는 국가적인 향연이 펼쳐졌다고 하며, 국화주를 마시거나 술잔에 국화를 띄우기도 했다는 내용이다.

소문으로는 많은 시인 묵객들이 진주를 찾아와 진주경관에 대한 시를 지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문헌상에 나타난 최초의 시는 1241년(고려 고종 28년)에 진주 목사로 와있던 김지대(金之岱: 1190~1266년)가 상주목사 최자(崔滋)에게 시를 써서 안부를 전한 것이 최초인데 이 시는 기상주목백최학사자(奇尙州牧伯崔學士滋)라는 제목으로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동문선’은 1478년(고려 성종 9년)에 편찬된 역대 시문선집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까지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쓴 문학 자료를 나름대로 집대성한 귀중한 책이다.

진주성내에 세워진 김지대의 시문판
진주성내에 세워진 김지대의 시문판

상기 시를 지은 김지대는 고려시대 문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시호는 영헌(英憲)이며, 청도 김씨(淸道 金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1217년(고종 4년)에 3만 명의 거란 병이 침입하였을 때, 아버지를 대신해 출전했는데 방패에 다음과 같은 시도 썼다고 한다.

國患臣之患

국가의 어려움은 곧 신하의 어려움이요,

親憂子所憂

어버이의 근심은 곧 자식의 근심이다.

代親如報國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면,

忠孝可雙修

충과 효를 모두 다함이 아니겠는가.

본 시의 내용으로는 김지대는 보기 드문 애국자이며 효자인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모든 군사들이 방패머리에 기이한 짐승을 그렸으나, 그는 시를 지어 붙였다고 하며, 전쟁에서 돌아온 이듬 해 장원급제까지 하였다.

한편 진주의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김지대가 촉석루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하륜이 ‘촉석루기’에 ‘촉석루는 김공(金公)의 손으로 시작되고 안상헌(安常軒)이 재성(再成)하였는데 모두 장원급제한 분들’이라고 한데서, 김공이 곧 김지대를 지칭한다. 차후 이 문제는 더욱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할 내용으로 보인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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