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근칼럼 東松餘談] 개판(開板) 5분전

2021-09-07     하동근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교수
하동근

‘개판 5분전’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주변이 너무 소란스럽고 무질서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고, 엉망진창인 상황을 일컫는다. 6.25전쟁을 치르면서 부산의 피난민촌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퍼진 당시 유행어다. 여기서 말하는 ‘개판(開板)’이란 표현은 피난민촌에 임시로 마련된 야외취사장의 커다란 가마솥 뚜껑을 연다는 의미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잔반을 모아 죽을 잔뜩 끓여 같이 나누어 먹었는데 배식하는 사람이 죽이 다 되면, 각자 밥그릇을 들고 줄을 서라는 신호로 “개판 5분전”이라고 큰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러면 가마솥 주변은 순식간에 먼저 배식을 받으려는 피난민들로 뒤엉키고 엉망이 되는 무질서한 상황이 연출되곤 했는데 여기서 비롯된 말이 ‘개판 5분전’이다. 가슴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다른 의미의 ‘개판’도 있다. 어떤 상태나 행동 따위가 사리에 어긋나 온당치 못하거나 무질서하고 난잡한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흔히들 ‘개판 다 됐다’고 하는 경우인데, 여기서 ‘개판’이란 동물인 ‘개’가 여러 마리가 뒤엉켜 싸우는 모습, 즉 ‘개싸움이 벌어진 판’을 형상화한 표현으로 통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엉망진창인 상황’ 또는 ‘서로 뒤엉켜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 등을 나타내는 의미로 해석한다. 사자성어인 이전투구(泥田鬪狗)란 개념에 가깝다.

그런데 앞의 개판이나 뒤의 개판이나 한글 표기로는 같은 ‘개판’이 되다 보니 그사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특별한 의미 구분 없이 혼용되면서 이제는 이도 저도 아닌 같은 개념으로 자리 잡은 느낌이 강하다. 더구나 요즘 젊은이들은 피난민 시절의 ‘개판 5분전’이란 의미조차 모르니 오죽하랴. ‘개판 5분전’이란 간판의 애완견 카페도 있고 보면, 그냥 의미도 모르는 ‘개판’이 남발되고 있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최근에 ‘개’하고 관련된 새로운 표현이 등장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GSGG’라는 영어로 된 개와 관련된 표현이다. 현직 집권여당의 한 초선 국회의원이 소속 당이 추진하고 있던 법안이 주변의 반대 여론에 밀려 본회의 통과가 미루어지자 SNS를 통해 자당 출신 대선배인 국회의장을 비난하면서 날린 표현이다. 당 안팎에서 상당한 논란이 되자 그는 ‘GSGG’는 ‘Government Serves General Good’의 약자이며 ‘정치권은 국민의 일반의지에 봉사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둘러댔다가 주변의 질타와 힐난을 얻어맞고 꽁지를 내리긴 했으나, 마지못해 한 사과는 전혀 진심이 아닌 것 같다.

보신탕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의 먼 옛날 얘기다. 유난히 개를 사랑하는 어느 방송사 사장이 외부 점심약속이 있어서 나갔다가 승강기를 탔는데, 그날따라 보도국 내근 기자들이 보신탕에 낮술까지 한잔씩 걸쳐 얼큰한 상태로 냄새를 잔뜩 피우며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장이 냄새를 맡고 ‘했구먼?’하면서 가볍게 한말씀 했는데, 마침 고개를 뒤로 돌리고 있던 한 부하 기자가 “요즘 개 안하는 놈들은 개밖에 없다”고 응답했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결론적으로 보신탕 안 먹는 사장이 개가 되는 참극이 빚어졌다. 이번에 GSGG라는 표현을 언급한 국회의원도 같은 맥락에서 자신이 쏟아낸 말이 부메랑이 되어 ‘개’와는 평생 인연을 뗄 수 없는 업보를 만들었다. 다만 한 가지, 공식 석상이나 공개된 자리 등에서 함부로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영어로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품위 있으면서도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해준 그의 공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덕분에 ‘Dog Ten Bird’이니 ‘CCBN’이란 신조어가 SNS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GSGG’와 함께 조만간 이들 단어들이 한영사전에도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대선을 앞둔 정치판이 갈수록 ‘개판 5분전’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