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두문동 칠십이현 임탁(林卓) 선생 모신 옥산서원

진주시 미천면 어옥마을에 위치 임탁(林卓)은 지극한 효성·청렴검소한 관리로 정평 사당·서당 – 강당·장서각 등 두 개 영역으로 분리 각 영역으로 출입하는 개별 대문 설치한 것이 특징

2019-05-24     경남미디어

<28> 진주지역 서원(書院)과 선현(先賢) <10>

진주시

옥산(玉山)서원은 진주시 미천면 어옥리 177-5 어옥마을에 위치한 조선시대 지워진 서원으로 나주 임씨 가문의 9대이며, 고려 십열, 두문동(杜門洞) 칠십이현(七十二賢) 가운데 한 분이신 감무공(監務公) 임탁(林卓)과 18대이자 감무공의 10세 손인 기암공(祈巖公) 임억(林億)을 함께 모신 곳이다.

서원은 본래 선현을 모시는 사(祠)와 제자를 교육하는 재齋에서 출발하여 훗날 이 둘의 기능이 합쳐진 것인데, 조선조에 들어와 전통적으로 세력이 강하며 붕당 등 정치적 움직임이 활발했던 영남유림의 많은 서원들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나주 임씨 9세, 호는 금은(錦隱), 감무공(監務公) 해남(海南) 감무(監務), 봉순대부(奉順大夫)인 임탁(林卓)은 젊어서부터 효성이 지극하더니 벼슬에 임해서도 청렴검소했다.

일찍이 외직으로 해남감무(海南監務, 從六品), 해주감목(海州監牧, 從五品)등을 역임하고, 내직으로 소윤(少尹, 從四品)을 역임하다가, 이성계 일파의 혁명으로 인하여 여흥왕(驪興王)과 윤왕(允王)이 시해되고, 최영, 변안열, 정몽주 등 고려 충신들이 잇따라 참화를 당함에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이 고려의 종사를 슬퍼하며 원주 치악산에서 단사(壇祠)를 모심에 임탁도 망복동지(罔僕同志)들과 더불어 참사하고, 기울어가는 고려의 운을 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마침내 간성왕(杆城王)마저 찬탈당하고 조선조가 건국함에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괘관현(掛冠峴)에 올라 뜻을 밝히시며 관복을 걸고, 통곡하면서 부조현(扶助(부조)峴(현)을 넘어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이태조가 왕위에 올라 여러 차례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벼슬 길에 나아가지 않고 나주(羅州)에 은거하여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다.

승국명류표방록(勝國名流標榜錄)은 임탁을 십열(十㤠)로 기록하고 배향(配享)하였다. 또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典) 충신각(忠臣閣)에 배향되었다.

특히 옥산서원은 사당(祠堂), 서당(書堂)으로 구분된 부분과 강당(講堂), 장서각(藏書閣), 재사(齋舍)로 구성된 두 개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각각의 영역으로 출입할 수 있는 개별 대문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