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10대구형왕1500년역사속으로]왕산사기 등 고대문헌 통해 ‘구형왕릉’ 입증

“왕릉이 있어 왕산이라 하며 절이 있으니 왕산사라 한다. 본래 왕의 수정궁(水晶宮)이며, 능은 가락국 제10대 구형왕께서 묻힌 무덤” 이라고 ‘왕산사기’에 기록 동국여지승람·대동여지도 등에도 기록

2018-11-23     경남미디어
고대문헌에서

 

김해를 중심으로 동으로 낙동강을, 서북으로 지리산을, 동북으로 가야산을 그 영역의 경계로 하였으나 4~5세기경에는 낙동강 상류인 상주와 선산 일대, 대구, 창녕, 밀양, 양산, 부산 등 낙동강 동쪽 지역과 소백산 줄기, 섬진강 유역의 전라지역까지 매우 넓은 지역을 확보하여 강성한 나라를 이룬다. 하지만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했던 가야는 491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끝을 맺지만 562년 가야 멸망 시기까지 대 연맹국을 결성하고 가야 부활을 주도했던 구형왕은 그 중심에서 고대 전쟁사 비운의 왕이 된다.

왕과 관련된 역사 사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고대사료는 부족하나 수년 동안 가락종친회와 지역의 사가들에 의해 왕의 행적과 능의 수호내력과 흩어져 있는 전설, 설화 등이 다소 정립되어 있어 왕과 왕산 고적에 대한 역사 사실을 알 수 있다.

문헌으로 나타나 있는 왕릉의 역사 사실은, 조선 전기부터 세종지리지(1454), 경상도속찬지리지(1478), 동국여지승람(1656), 산청현읍지(1744), 대동여지도(1864) 등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시대 중기 성대중 조진관(1739~1808)의 양왕릉 심릉기와 문인 홍의영(1750~1815)의 왕산 심릉기(王山尋陵記)에도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고, 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어 있다’라는 문헌 내용을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내용으로는, 왕산사기(王山寺記)는 왕산아래 있는 구형왕을 수호하던 왕산사의 내력을 적은 기문(記文)으로 조선 중기 고승 탄영(僧 坦瑛)이 효종 원년(청나라 순치7년:1650)에 작성하였다고 전한다. 탄영 스님은 그 후 숙종 13년(청나라 강희26년:1687) 방호산인 형곡당 복환(方壺山人 荊谷堂 復還)이 수정암기(水晶菴記:왕산사의 개칭)를 지었을 때 그의 문인(門人)으로써 글을 쓰기도 하였다.

왕산사기에서 구형왕릉에 대한 기술 내용을 보면 ‘산양현(山清)의 서편 모퉁이자, 방장산(智異山)의 동쪽 산록에 산이 있으니 왕산(王山)이라 하고, 절이 있으니 왕산사(王山寺)라고 한다. 산상에는 왕대(王臺)가 있고, 산하에는 왕릉(王陵)이 있으므로 왕산이라 하며, 왕릉 수호를 맡으므로 왕산사라하는데, 절은 본래 왕의 수정궁(水晶宮)이었고, 능은 이에 가락국 제10대 구형왕(仇衡王)께서 묻힌 무덤이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글쓴이 김태훈 가락국양왕덕양전 참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