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한자 64괘(卦) 중 坤(곤, 땅)·離(리, 번창) ‘번창하는 땅’

삼한시대 고순시국(古淳是國), 가야시대 고녕가야(古寧伽耶) 삼국시대 거열성(居列城), 통일신라시대 거열주(居列州) 통일신라 문무왕 시대 ‘진주’라는 고을 초기형성 시작 일찍부터 명성지지(明盛之地) 즉 산 좋고 물 좋아 옛부터 유수(有數)한 인물의 보고(寶庫)로 명성 자자

2019-11-20     경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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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1. 시작하면서–진주(晉州)의 어원적(語源的) 의미

2.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진주유적

3. 가야시대(伽耶時代)의 진주

4. 큰 고을로서 진주의 성장과정

5. 호족(豪族)중심 고을로써의 진주

6. 진주목(晉州牧)의 형성과정

7. 진주지역 토박성씨(土薄姓氏)와 인물

8. 고려시대 진주민란의 실태와 영향

9. 조선 초기의 진주

10. 1, 2차 진주성 전투

11. 남명(南冥)과 진주

12. 유력 진주출신 씨족들의 활동 상황

13. 1862년 전국 최초 진주농민운동

14. 동학농민운동과 진주

15. 항일의병운동시기의 진주

16. 한국 인권운동 비조(鼻祖) 진주형평운동(晉州衡平運動)

17. 근·현대 도시로써 진주의 발전과정

지금까지 본지에서는 50여회에 걸쳐서 진주 역사와 문화의 전개과정을 주로 지역의 유명 문화재를 중심으로 향토사학적 견해로 기술했다.

그 결과 진주역사에 대한 수직적 일관성이 구성되지 않고, 산발적이고 동시에 매우 부분적으로 부실한 고찰에 그쳤으므로, 이제부터는 시대적 획일성(劃一性)과 문화적 다양성(多樣性) 표출 중심으로, 선사 이전의 공룡시대(恐龍時代)부터의 진주형성 과정을 비교적 현실감 있게 지역의 정통문헌(正統文獻)을 바탕으로 기술 전개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우선 선사시대의 진주형성 역사를 기록하기 전에 진주의 현황(現況), 진주라는 지명의 어원적(語源的) 의미 그리고 진주의 전통적인 상징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오늘의 진주시는 한반도의 남부 명산인 지리산의 동남부에 위치하여 남강을 안고 있고, 남해바다와 가까우며, 자연 풍광이 지극히 아름다운 도농복합도시(都農複合都市)로 동쪽은 함안군, 서쪽은 하동군, 남쪽은 고성군, 북쪽은 산청군과 의령군을 접하고 있다. 면적은 712.84㎢, 인구는 약 35만으로 행정구성은 1읍, 16개동, 15개면으로 되어 있으며, 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육과 문화의 도시로 성장해 오고 있다. 현재는 첨단산업단지(尖端産業團地)가 입지(立地)한 문화산업도시이며, 또한 혁신도시로써 말 그대로 서부경남의 중심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이어 진주(晉州)라는 지명(地名)에 대한 어원적(語源的)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원래 진주(晉州)의 ‘晉’이라는 문자적 의미는 한자의 64괘(卦) 중에 ‘坤(곤, 땅)’과 ‘離(리, 번창)’의 복합의 의미로 표기됨으로써, 진주라는 도시는 일찍부터 명성지지(明盛之地) 즉 산 좋고 물 좋아 옛부터 유수(有數)한 인물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주의 기원은 언제, 어느 시대 또 어디에서 그 시원(始原)의 태동(胎動)이 이루어졌는지를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 동시에 역사적 문헌자료를 기초로 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는 통상 ‘천년고도(千年古都)’니 또는 ‘오백년고도(五百年古都)니 하는 막연히 그리고 대충으로 지역의 역사 연도를 편의상의 수치로 말하는데, 앞으로 진주의 보다 진실한 역사와 문화의 전개과정을 기록하려는 본 작업에 앞서서, 우리 고을 진주의 초기 형성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공인할 수 있는 연대(年代) 수치를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그러나 그 작업은 지역사에 관한 정확한 문헌과 역사적 기록에 의해서만 수행할 수 있기에, 그나마 우리로써는 진주의 형성과 기원에 관한 적합한 자료와 문헌으로 ’진양지(晉陽誌)‘와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그리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覺)‘ 등과 같은 뚜렷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음을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싶다.

상기 세 문헌에 따르면, 진주(晉州)는 현재의 지명이 있기 전 삼한시대에는 고순시국(古淳是國), 가야시대는 고녕가야(古寧伽耶), 삼국시대는 거열성(居列城), 그리고 통일신라시대는 거열주(居列州)라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상기 기록 중 통일신라시대 이전의 기록은 대개 전대 학자들의 추정(推定)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역사자료의 定說(정설)에 의하면, 옛부터 고을의 명칭에 ‘州(주)’라는 어휘가 첨가될 때부터 공식적으로 역사성이 인정되는 지명으로 간주해 왔다. 더욱이 통일신라시대부터 ‘州(주)’ 고을 이름에 첨가되면 중앙정부로부터 관리(官吏)를 파견하여 그 고을을 다방면으로 지원, 관리, 통제하여 지역민 모두가 살아가기에 매우 쾌적한 고을로 발전할 수 있도록 개발해 주기까지 했다고 되어있다. 그런 역사적 연유로 진주는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3년 663년부터 소위 ‘거열주(居列州)’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명실공히 진주고을 초기형성의 정확한 역사는 1356년으로 기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도 그 기록의 정확성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향후 지역의 후대 연구자들의 많은 노력에 달려 있다고 사료된다.

그리하여 본지에서는 이제부터, 태고의 선사시대로부터 진주형성 과정을 시대적 흐름에 따라 나타난 각종 문헌과 연구자료를 참고로 다음과 같이 그 기술(記述)의 순서를 나열해 보기로 한다.

먼저, ‘1. 시작하면서–진주(晉州)의 어원적(語源的) 의미’에 이어 2.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진주유적 3. 가야시대(伽耶時代)의 진주 4. 큰 고을로서 진주의 성장과정 5. 호족(豪族)중심 고을로써의 진주 6. 진주목(晉州牧)의 형성과정 7. 진주지역 토박성씨(土薄姓氏)와 인물 8. 고려시대 진주민란의 실태와 영향 9. 조선 초기의 진주 10. 1, 2차 진주성 전투 11. 남명(南冥)과 진주 12. 유력 진주출신 씨족들의 활동 상황 13. 1862년 전국 최초 진주농민운동 14. 동학농민운동과 진주 15. 항일의병운동시기의 진주 16. 한국 인권운동 비조(鼻祖) 진주형평운동(晉州衡平運動) 17. 근·현대 도시로써 진주의 발전과정 순서로 기술하고자 한다.

 

강신웅

본지 주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