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10대구형왕1500년역사속으로]가락국 마지막 왕 기리는 덕양전

가야 마지막 구형왕·왕비 신위 봉안 왕의 침궁 ‘수정궁’이 덕양전 모태 신라 문무왕 때 왕의 제례 시작 유교 고장인 산청의 제례문화 근원지

2018-12-16     경남미디어

세 번째 이야기 ‘덕양전’ <1>

산청군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자락에 위치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0호 가락국양왕덕양전(駕洛國讓王德讓殿)은 가락국(駕洛國, 金官伽倻) 마지막 10대 왕인 구형왕(仇衡王)과 계화왕후(桂花王后)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한 곳으로 매년 두 차례 봄, 가을에 대제가 봉향된다. 구형왕의 역사와 함께 240여년 이어져 내려오는 덕양전 제례는 지역의 유서 깊은 역사로 자리 잡고 있으며 유교의 고장인 산청의 제례문화 근원지가 되고 있다.

국가문화재 제214호 구형왕릉과 함께 지역의 특별한 명소로 자리 잡고 있는 덕양전은 왕산 아래에서 우아한 풍광을 자아내며 유구한 가락국 제례역사와 전통문화 보존과 계승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덕양전은 서기 532년 구형왕과 계화왕후가 왕산으로 이거한 후 ‘태왕궁’을 ‘수정궁’이라 편액하고 잠시 칩거를 하였던 곳이다. 나라를 지키지 못함에 “돌로써 덮어달라” 하신 유언으로, 지역의 군·관·민에 의해 석릉이 조성되고, 손자 신라각간 김서현(김무력의 아들)에 의해 왕의 수정궁이 왕산사로 바뀌어졌다.

삼국통일의 주역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은 이곳에서 7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시조(김수로)왕의 명료를 왕산 중턱의 왕대에 추봉하고 왕산사는 양왕(구형왕)과 선대왕들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으며, 왕릉 옆 터에 단을 쌓아 전각을 짓고 왕의 침궁이었던 수정궁을 그대로 편액하여 제향을 받을게 되니, 그 수정궁이 지금 덕양전의 모태가 된다.

그로부터 1400여년 동안 가락국 후손들과 지역민들에 의해 왕께 받들어졌던 구형왕의 제례역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때에 국가적 차원에서 능묘의 중수와 사당의 중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가락국시조대왕 승선전지의 내용을 보면 문무왕은 “나는 구형왕의 5대 외손이다. 중사를 파견하여 석공을 거느리고 가서 사당을 깨끗하게 단장하고 왕산사를 거듭 새롭게 하는 한편 왕릉 부근의 땅 30경을 봉하여 제사 지내는 비용과 7세대의 밑천으로 쓰게 하였으니, 때는 당나라 의봉 원년이었다.”라는 기록으로 신라 문무왕 16년부터 가락국 구형왕의 제례가 있었던 기록이 전해져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변하여 왕묘가 황폐하여졌음에도 여러 왕대의 역사를 거듭하면서 구형왕의 사당인 왕산사 복원과 능묘의 중수가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으며 전란으로 인하여 잠시 제사가 끊어졌다가, 1798년 영남유생 민경원에 의해 또 다시 심릉사실이 이루어지면서 구형왕의 전각이 중건되어 다시 제사를 받들었음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글쓴이 김태훈 가락국양왕덕양전 참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