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7. 진주지역의 고려고분(高麗古墳) 현황

고려문화재 연구를 활성화시킨 진주지역 고려고분

2020-06-18     경남미디어

평거동 고려고분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 고분
나주 정씨 집안 고분 6기 신라서 이어져 온 전통형식
대문벌 고분, 지방에 조성된 것은 지방정치 공평화 뜻

6기 고분 형태·규모 같아 보이나 신분·지위에 따라 구분
이에 고려조 철저한 신분 사회 확인…문화재 연구 도움

사적164호인

900년대에서 1300년대 말까지 이어진 고려왕조와 진주와의 역사적, 문화적 연계성(連繫性)은 그렇게 밀접하거나 다양하지 않다. 단지 통일신라 말경부터 고려초기까지 큰 고을로 성장하게 된 진주지역은 그런 성장에 상응하는 인적, 물적 토대를 갖추면서, 단지 신라 말엽과 고려 초엽의 혼란기에 호족이 성장하고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그 무렵 이곳 진주에는 특별한 문화적 발전의 흔적(痕迹)이나 유적(遺蹟)은 거의 전개되지 못하고, 지역의 특별한 정치적 상황 속에 진주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소위 호족(豪族)으로 유명한 윤웅(閏雄)과 왕봉규(王逢規)라는 두 사람이 고려조에 있어서 진주역사의 주목할만한 사실(史實)로 기록되어 있을 뿐, 문화적, 또는 실물적으로 진주가 고려조 때에 남긴 역사, 문화적 유산(遺産: 단지 龍巖寺址, 妙嚴寺址, 杜芳寺 등 몇몇 진주 지역 사찰 내에 있는 탑 몇 개 만이 진주지역의 고려시대 유명 문화재로 남아 있을 뿐)은 아쉽게도 그렇게 많이 찾아볼 수 없다.

단지 1960년대 말경에 고려시대의 문화재로 보이는 고분(古墳) 몇 기(基)가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진주에서 발견된 고분들의 위치와 특징, 그리고 문화재적 가치를 고찰해보기로 한다.

우선 그 고분군(古墳群)의 위치는, 현 진주시 평거동 석갑산(石岬山) 주변이다. 어쩌면 석갑산의 지명도 고려고분군에 갑석(岬石: 산과 산 사이에 계속 이어진 돌무더기)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총 여섯 기(基)의 고려시대 방형분(方形墳)으로, 고분의 축조 시기와 피장자(被葬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여섯 기 모두 나주정씨(羅州丁氏) 집안의 무덤이다.

1079년( 1호분)부터 1228년( 6호분)까지 150년간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사적(1968년 12월 19일)으로 지정되어 있다. 고분군을 찾아가는 산길은 산책 겸 등산길이며 안내판도 제대로 비치되어 있어 찾아가기가 비교적 쉽다. 또한 체육공원도 조성해 두고 있어 가벼운 운동도 할 수 있다.

이어서, 진주의 고려 고분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제1호분은 평면 장방형으로 지대석(地臺石)과 호석(護石,보호석), 우주(隅柱,모퉁이 기둥석), 갑석(甲石, 돌위에 다시 포개어 얹는 납작한 돌)을 갖추고 있다. 호석은 지대석 위에 폭이 넓고 높이가 낮은 우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1매의 면석을 세운 다음 그 위를 갑석으로 덮었으며, 갑석은 각 우주 위에 1매 그리고 면석 위에는 같은 크기의 판석 2매를 덮었다. 그리고 고분 정면에서 지대석 앞쪽으로 1단 낮게 관석을 달아내었다. 정면의 기단면석에 ‘원풍 이년시월일일 대상정열지묘( 元豐 二年十月一日, 大相丁悅之墓),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1079년(고려 문종 33년)에 해당하며, 대상(大相)은 고려시대의 향직(鄕職) 제7위로 제4품에 해당된다. 여섯기의 고분 중에 설치 연대가 가장 빠르며, 규모는 너비 3.3m☓3m, 높이 1.5m이다.

다음 제2호고분은 장방형의 호석을 갖춘 것으로 기본 구조는 1호분과 같다. 그러나 지대석의 가장자리에 턱을 주어 마치 지대석이 2단처럼 보이게 하였으며, 전면(前面)의 경우 지대석에 잇대어 묘의 양옆으로도 판석을 깔았고, 무덤 앞으로 판석 1단을 더 달아낸 것은 1호분과 같다. 전면 면석에 ‘융흥삼년을유이월정윤화지묘(隆興三年乙酉二月丁允樺之墓)’라고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때는 1165년(고려 의종 19년)에 해당된다. 정윤화라는 사람은 1호분에 새겨진 정열(丁悅)의 4대 후손으로 파악되고 있다. 규모는 너비 3.3m☓2.8m, 높이 1.3m이다.

다음 제3호분은 2호분의 아래쪽에 위치하며, 전체 형태는 앞의 1,2분과는 전혀 다르다. 봉토 아래 지대석(地臺石)과 호석(護石), 우주(隅柱 ), 갑석(甲石)을 갖추고 있지만, 봉토의 하단 전체를 돌린 것이 아니고 앞쪽의 절반가량만을 둘렸다고 볼 수 있다. 기단의 구조는 앞의 것들과 대체로 같은 형태이나, 갑석의 모서리를 마치 탑의옥개석처럼 끝이 약간 들리도록 능각(陵角)을 주어 처리하였고, 삼엽화문(三葉花紋)을 음각(陰刻)하엿다. 묘 앞에는 ‘정공윤종지묘(丁公允宗之墓)’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는데, 정윤종은 2호분의 주인공인 정윤화의 아우로, 무덤의 연대도 1165년보다 약 20년정도 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1,2호분보다 더 크게 조성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4, 5, 6호분은 같은 나주정씨 집안의 정언진(정언진) 대장군, 이어 5호분은 ‘대상정육장(大相丁堉葬)의 부부합장묘이며, 6호분은 1228년(고려 고종15년)때에 조성된 것으로 평거동 고분중에 제일 늦게 조성된 것으로 ’소정원년 정량묘(紹定元年 丁良墓)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상기 진주 평거동 고려 고분군은 그나마 진주지역에 부족한 고려문화재에 대한 여러 다른지역의 고분에 비해서, 신라 이후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형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므로 차후 진주 지역의 고려문화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줄로 안다.

강신웅(姜信雄)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