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빨래 호강
[정용우칼럼] 빨래 호강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2.04.20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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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빨래’하면 나에게는 아득하게 떠오르는 추억 하나 있다. 아주 어릴 적 이야기다. 아마 내가 초등학교 상급반이었을 게다. 그 당시 심한 피부질환이 내 장딴지에 생겨 걷지를 못하게 되었다. 걷지를 못하니 면소재지 의원(사람들이 부르는 말이 의원이지 의사 면허는 없고 그저 치료사임)에게 치료하러 걸어갈 수가 없었다. 마땅한 교통수단도 없었으니 어머니께서 나를 등에 업고 갈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상급반이었을 테니 상당히 무거웠을 텐데 2.5Km 떨어진 면소재지 의원까지 그것도 왕복으로. 이러기를 몇 차례나 거듭한 후 어찌어찌하여 병은 나았다. 다시 걷게 되면서 그간 베풀어주신 어머니의 수고로움을 생각했고 뭔가 그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다. 하여 내가 생각해 낸 것이 어머니 빨래 일을 도와주는 것.

어느 해 겨울, 몹시 추웠던 날로 기억하는데 어머니께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남강(南江)에 빨래하러 가신다고 했다. 그 시절 세탁기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강가 어느 지점이 빨래터였다. 추운 겨울이어서 강에 얼음이 얼었다. 그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신다. 물론 고무장갑도 없었다. 얼마나 손이 시리셨을까. 이 생각을 하고는 리어카에 짚단을 실었다. 물론 빨랫감도 실었다. 강둑 아래 농로까지 이렇게 내가 싣고 가면 강둑 넘어 빨래터까지는 어머니께서 빨랫감을 머리에 이고 가시면 된다. 나는 짚단을 둘러메고 함께 빨래터로 향한다. 어머니가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신다. 나는 옆에 짚단으로 불을 피운다. 어머니와 아주머니들이 빨래하시던 중 손이 시리면 불 옆으로 다가와서 손을 쬐인다. 이렇게 하여 빨래는 끝이 나고 어머니, 아주머니들 빨래를 리어카에 싣고 마을로 돌아온다. 어머니와 아주머니들은 수시로 내가 끄는 리어카를 뒤에서 밀어주시고... 강에서 마을까지 1.3Km 농로가 웃음으로 뒤덮힌다. 그 웃음 속에서 그 날 내 리어카에 실린 빨래는 참 호강했으리라.

이 추억을 되살리며 오늘 빨래를 했다. 혼자 살아가지만 그래도 빨랫감은 생기기 마련이다. 늙어 갈수록 정갈하게 자신을 관리해야 하는 책무 때문일까. 혼자 살다보니 빨랫감도 많지 않을뿐더러 세탁도 기계가 다 해주니 그리 수고롭지도 않다. 그저 세탁기에 집어넣고 과산화수소 몇 스푼과 세제 몇 스푼 넣고 작동만 시키면 된다. 그 다음 한 시간쯤 기다렸다가 빨래를 세탁기에서 꺼낸다. 다음은 말리는 일이다. 말리기에 좋은 날이 있다. 햇볕이 내리쬐고 미세먼지는 없으며 약간의 바람이 불면 금상첨화다. 오늘 같은 날이다. 건조대를 초록 잔디밭 위에 설치하고 빨래를 널어 말린다. 미세먼지 한 점 없이 하늘은 맑고 푸르다. 게다가 시절은 바야흐로 봄, 우리 집 정원에서는 각종 꽃들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피어난다. 특히 그 중에서 연산홍은 아름다움의 극치다. 나무 수령이 20년을 넘었으니 키도 클뿐더러 꽃도 아름답다. 꽃 색깔도 6종류나 되니 그야말로 형형색색이다. 초록 잔디 위에서 연산홍에 둘러싸여 말라가는 빨래... 그 모습을 사진 찍어 아내에게 보냈더니 바로 답신이 왔다. “오늘 우리 집 빨래가 호강하네요.”

이렇게 어머니가 하신 빨래든, 내가 한 빨래든 모든 빨래는 호강하는 셈이다. 그 호강하는 빨래를 바라보는 나도 덩달아 즐거워진다. 찌든 몸과 마음이 깨끗하게 세척되어지는 느낌이 든다. 이 같은 기분으로 시를 짓는 사람도 있으리라. 김혜숙 시인의 ‘빨래’라는 시도 그 중 하나다. 봄날, 진해지는 햇살 아래서 읽으면 더할 나위 없이 딱인 작품이다.

빨래로 널려야지/부끄럼 한 점 없는/나는 빨래로 널려야지.//피얼룩/기름때/숨어 살던 눈물/또 서툰 사랑도/이젠 다 떨어버려야지.//다시 살아나야지.//밝은 햇볕 아래/종횡무진 바람 속에/젖은 몸 다 말리고//하얀 나래 퍼득여야지/한 점 부끄러움 없는/하얀 나래 퍼득여야지.

봄을 바라보는 마음은 절망보다는 희망 쪽이다. 지금은 비록 각종 병고에 시달리고 있어 죽을 맛이지만 햇볕이 밝고 하늘이 맑은 날은 그런 희망을 품게 된다. 오늘같이 좋은 날에는 나도 빨래 탓에 더욱 그렇게 된다. 오늘 같은 봄,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꽃들과 함께 호강하고 있는 저 빨래들처럼 나도 이 아름다운 봄날, 호강 좀 하고 싶다. 내 몸에 묻은 더러움, 내 마음에 묻은 더러움 싹 빼고, 맑은 물에 헹궈져서, 햇살 아래 하얗고 빳빳하게 다시 태어나고 싶다. 완전히 새로운 몸은 욕심일 테니 이 몸 그대로, 대신 좀 깨끗하고 당당하게 다시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봄은 일종의 기회다. 봄이 왔으니 다시 살아봐야지. 다 잊고 내려놓고 살아봐야지. 오늘 아내가 보내준 ‘빨래 호강’의 멋진 표현처럼 새 핑계가 하나 더 생겼으니 내 병고, 빨래처럼 햇볕에 말끔히 소독되길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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