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보리수 열매
[정용우칼럼] 보리수 열매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2.06.0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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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경기도 가평에 사는 대학 친구 한 분이 단톡방에 자기가 농사지어 수확한 보리수 열매 사진을 올려놨다. 가평이 북쪽에 있어 지금쯤 보리수 열매를 수확하나 보다. 우리 집 마당 서편 끝에 심어져 있는 보리수나무는 거의 끝물에 다가가는데...

보리수나무는 열매가 엄청 많이 달린다. 보리수나무는 열매를 잎 아래에 숨겨 두고 있기 때문에 대충 보아서는 그것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나뭇잎을 들추어보면 잘 익은 보리수 열매가 그야말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우리 집 보리수나무는 심은 지 20년이 넘었으니 그 열매가 엄청나게 많이 달린다. 두 손으로 따서 입에 넣어 본다. 덜 익었을 때는 약간 신맛이 나지만 잘 익었을 때는 그리 시지 않아 6월 나의 간식거리 중 하나다. 그렇지만 잘 익으면 이 열매는 약간 무른 편이어서 며칠간 나무에서 버티다가는 곧 떨어져 버리기 때문에 시기를 맞추어 따지 않으면 안 된다. 따는 시기를 놓쳐버리면 그냥 땅에 떨어져 버리거나 쭈굴쭈굴해져 버린다. 동네 사람들에게 따서 먹으라고 해도 그렇게 잘 안한다. 시골 사람들은 남의 농작물이나 과실에 손대는 것을 아주 꺼리기 때문이다. 이 보리수나무 열매가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에게 아주 좋다하여 내 여동생이 남편을 위해 따가서는 술을 담그기도 했는데 요새는 여동생도 나이가 들어 쉽게 오갈 수 없는 처지이고... 아내는 잼을 만드는 것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지만 이 또한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냥 나무에서 떨어져 버리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하는 안타까움.

그러던 중 이웃에 사는 함양아주머니께서 자기가 키운 상추를 한 바구니 갖고 오셨다. 내가 보리수 열매를 따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곧 보리수 열매 따기에 합세했다. 자기 딸이 이 보리수 열매를 너무나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함양아주머니 딸은 장애인이다. 독립된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능이 떨어지는 장애인이다. 그러하니 아예 결혼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부모님과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어떤 때는 장애인 요양원 같은 데로 보내졌는지 보이지 않는 때가 가끔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나날을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같이 살고 있다. 우리 집을 지나갈 때는 나를 알아보고 (말이 아니고) 소리를 질러 인사하는 경우도 있다. 착하디착한 소녀인지라 그 웃음마저도 깨끗하고 소박하다. 가끔씩 삶이 어려워 뭔가 풀리지 않을 때는 그네 집 옥상에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기도 하고... 이런 딸을 데리고 살아가야 하는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나는 함양아주머니께서 자기 딸이 보리수 열매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나에게 말씀한 날 이후부터 보리수 열매를 열심히 따냈다. 그간 별로 용처를 찾지 못해 안타까워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 보리수 열매를 함양아주머니 댁에 갖다주기만 하면 된다. 아주머니 집 대문에는 큰 개가 지키고 있다. 우렁차게 짖어대니 집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대문 입구에 보리수 열매가 담긴 그릇을 놓아두기만 하면 개가 계속 짖어대니 곧장 알아챈다. 아주머니께서 나오시고 딸도 따라 나온다. 내가 보리수 열매를 가져온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농사일 나가셨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다. 아저씨는 나이가 들고 관절에 병이 나서 주로 농사일은 아주머니가 하시니 집에 없을 때가 많다. 나이 80 중반을 넘은 아저씨는 농사일 대신 가끔 딸을 데리고 산책에 나선다. 오늘도 산책을 나가셨는가 하고는 대문 입구에 보리수 열매를 놓고 온다. 그러면 나중 우리 집 거실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보리수 열매를 담았던 그릇이 놓여 있다. 그 그릇에는 자기들이 농사지은 상추가 가득 들어 있고... 나는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여러 번 보리수 열매를 갖다주었다. 그런데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 될 듯하다. 수확 끝물이라 수분이 빠져 쭈굴쭈굴해져 상품 가치가 현저히 줄어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보리수 열매를 그 집 입구에 놓고 오면서 생각해 본다. 내가 병이 난 것도 또한 어딘가 쓸모가 있었다는 사실...

끝 모를 한과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사회의 무관심 속에 하루하루 힘겹게 버텨온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우리 주변에 수없이 존재하지만 그들의 고통을 나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느껴보지 못했다. 야만의 인격이었다. 타인의 아픔을 느끼는 인간의 능력, 공감능력이 고장 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병들어 아픈 몸으로 살아보니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보다 고통이 낫다”는 아리송한 이야기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지배자들과 다르게 고통 속의 인간에게는 타들어 가는 목마름으로 신을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을 테니... 신이 이들에게 응답하였는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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