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희의 세상엿보기] 상식의 정치와 보편의식
[김용희의 세상엿보기] 상식의 정치와 보편의식
  • 김용희 시인·수필가
  • 승인 2021.09.28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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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희 시인·수필가
김용희 시인·수필가

‘윤석렬 후보 실언 모음’ 같은 건 없나? 이한열 부마사태, 나눠줄 세금을 왜 거두나. 유주택자가 필요한 청약통장, 주 120시간 노동 필요성, 후쿠시마 원전 무방사능, 페미니즘에 의한 연애불가론, 대구 민란, 빈자의 부정식품 섭취론, 안중근과 윤봉길 혼동, 손발 노동자 무용론.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차이. 미군 점령군…. 그분은 여당의 말에 따르면 “기존 망언을 새로운 망언으로 덮는다”고.

그럼에도 지지율 야권 1위인가? 아니면 홍준표가 골든 크로스인가? 발표기관과 언론에 따라 여론지지율과 적합도 조사결과가 널뛰기 식이다. 뭘 믿어야 할지, 아님 애시당초 믿음같은 것 기대하지 말아야 할지.

실언에도 급수와 유형이 있겠다. 청약통장, 이한열, 윤봉길 의사 등은 좀 쎄다. 실언들을 유형으로 분류해 보면 ‘역사에 대한 기본 인식 아니 의식부재’와 ‘사회 시민계급에 대한 비하’로 구분할 수도 있겠다. 역사의식 부재는 정통성 혹은 민족자결과 연결되며 사회시민 보편의식의 결여는 특권의식 속에서 살아온 그가 시민을 피지배자 통제 처벌 통치의 대상으로 객관화 사물화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 우월감에서 비롯된다 하겠다.

즉 ‘너네 하층민들의 사유와 사고 삶의 본질과 애환 같은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강한 전제와 인식이 깔려있는 극단적 권위주의의 발로라 할 수 있겠다. 어떻게 가난한 자는 ‘부정식품을 먹을 밀턴 프리드만의 자유’, ‘주 120시간 근로의 자유’ 나아가서 청약통장 같은 것은 알 필요가 없다는 인식까지 진행될까? 이런 발언들은 스스로 특권층이라는 의식구조에서 연유한 일반 백성과의 분절로 밖에는 해석할 수 없겠다.

역사지식은 지도자로서 필요한 최소의 지적 인프라이고 기본 중의 기본인 필요적 소양이다. 가치관이 다를 수는 있지만(그것은 선택의 문제니까) 아예 역사의식이 부재하다는 것은 지도자로서의 심각한 흠결이요 하자다. 국민들이 검찰의 눈에는 범죄자, 용의자, 사기폭력의 소질만 가진 부조리한 생체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때문에 심판자 처벌자로 자신들을 인식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 스스로는 특권주의 완전주의자가 되었고 따라서 자신들이 받는 공격은 곧장 피해자 코스프레로 연결되는 자동화 시스템이 구축되었겠다. 따라서 이들은 절대로 죄의식이나 반성 같은 것은 없다. 자신에 대한 문제제기는 핍박으로 정치적 음해로 인식할 뿐이다. 그렇게 “새빨간 거짓말, 언제가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굳게 스스로 믿는 특별한 분들이 된 것이다. 그들에게 백성은 지배당하기 위해 있는 자신들과 동급의 인간이 아닌 대상화 된 객체가 됐을 뿐이다.

일전에 어느 법조인이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시민은 관리 통제의 대상일 뿐"이라고. 어디 감히 자신들과 같이 비교되냐고. “너네들을 관리하고 처벌하기 의해 죽도록 충성고심하는 우리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느냐”고.

그들은 어쩌면 완벽한 권위주의의 감옥에 빠져있는, 스스로도 구제못할 어쩌면 인간괴물이 되어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일반 백성의 눈에는 그들이 두뇌는 명석하고 기억력은 꽤나 우수한 자폐증 환자들, 몇 가지 능력만 특출한 그러나 인간 보편의식이 결여된, 소위 외식하는 자 사마리아인 회칠한 무덤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린 상식의 지도자를 원한다. 특별능력 말고 보편적 능력, 대중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국민을 가축 쯤으로 보지 않는, 지배와 피지배, 상놈과 양반, 사대부와 농노로 구분하지 않는 그런 분을 원하는 것이다.

“개가 문자를 알면 사람행세 하려한다” 세종 시절 한글반대론자들의 의식이다. 이런 와중이라 세종은 한글 창제보다 반포가 더 어려웠다고. 이번 대선도 백성을 가축취급하지 않는 정도의 지도자라고 뽑아보자. 웃기게도 돌아보면 지난 시절 그들의 대부분은 아니었는 것 같다. ‘저수지’를 만들거나 ‘정치를 외주’하거나 무자비한 권총정권이었거나. 그렇게 사실 그들만의 리그를 해온 셈이다.

세종과 이순신이 왜 ‘대왕’이요 ‘성웅’인가? 그 위대한 눈물나는 민족의 자부심인 그분들은 최소 자신을 위해 살지는 않았다. 세종은 과로로 온갖 질병으로, 이순신은 목숨까지 내어주며 그야말로 상식과 보편을 실현한 분들이기 때문이다. 음흉하고 음습한 야욕을 숨긴 완벽한 특권의식의 감옥에 갇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그들과는 달랐기에 우리 역사는 그분들 앞에니 머리 숙이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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