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진주지역의 선비사상 면면히 전승해온 임천서원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진주지역의 선비사상 면면히 전승해온 임천서원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3.2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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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액 받지 못하고 비지정문화재로 남아 안타가워
하증(河憕) 덕천서원 중건과 진주향교 중건에 앞장
한몽삼(韓夢參)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맹활약

<20> 진주지역 서원(書院)과 선현(先賢) <2>

임천서원 편액.
임천서원 편액.

지난호에 이어 세 번째, 창주공(滄州公) 하증(河憕) 선생은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국보(國寶)이며 생부(生父)는 국보의 맏형 위보(魏寶)이다. 창주의 생부와 숙부 하진보(河晉寶), 백형 하항(河恒)은 모두 ‘덕천사우연원록’에 이름이 올라있는 남명 문인들이다. 이에 창주는 일찍부터 남명의 학문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창주는 23세 때 환성재 하락, 무송 손천우, 백암 김대명, 모촌 이정, 영무성 하웅도, 봉강 조겸, 조계 유종지 등과 현재의 진주 수곡면 공옥대(拱玉臺)에 모여 학문을 토론했으며, 29세 때는 능허 박민, 봉강 조겸 등과 진주 청곡사에서 근사록을 읽었다. 창주가 당시 교유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남명의 제자들이다.

29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후로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고자 했다. 조정에서 벼슬하기보다는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면서, 남명선생의 유업을 받드는 일에 항상 앞장을 섰다. 우선 임진·정유왜란으로 말미암아 불에 타버린 덕천서원을, 이 지역의 선비들과 의논하여 중건을 하게 된다. 그리고 1622년 그 자신이 중건 기문을 지어 후세에 상세히 전하고자 했고, 덕천서원 중건 후에는 진주향교의 중건에도 앞장을 섰다.

44세때(1606년) 덕천서원 원장으로 취임하여, 먼저 덕천서원 원생록을 수정 보완해 남명의 학맥을 정리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후 창주는 남명선생 학기유편 간행, 남명선생 문집 교정 등 여러 가지 일들을 주도하게 된다. 55세 때(1617년) 한강 정구등 여러 선비들 남명 선생을 문묘에 종사해 달라고 하는 상소를 하기 위해 고령에 모였는데, 이때 한강 문인 이서가 지은 상소문을 창주가 수정 보완해 조정에 올렸던 것이다.

남명선생 문묘종사의 일로 인해 창주는 한강과 자주 접하게 되고, 한강은 창주의 식견에 매우 만족해하며 덕천서원의 일을 상의했다. 이로 말미암아 후세 사람들은 창주를 한강의 문인이라고 한다. 창주 문집에도 창주가 1617년 남명 선생 문묘종사의 일로 한강을 찾아가 질문한 ‘신안어록(新安語錄)’ 등을 싣고 있는 등 한강과의 관계를 부각시키고 있다.

하증은 남명 선생의 일을 마무리 할 때 쯤인 60세 때 인근고을의 선비 부사 성여신 등과 함께 진주 청곡사에서 진양지(晉陽誌) 편찬을 했다. 55세 때는 외증조부인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시집도 발간했는데, 관포는 149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 여러 외직을 거쳐 1510년(중종 5년) 장령이 됐으며 그 뒤 헌납, 교리, 대사간을 역임했고, 곤양군수로 있을 때는 퇴계 이황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이후 창주는 고향에서 선현들의 유업을 기리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정성과 근면의 뜻인 ‘성(誠)’ 자를 마음에 새겨 종신토록 이를 실천하고자 했다. 그의 나이 60이 되어 문득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誠’을 실천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고, 스승인 남명을 위해 정성을 다해 평생 동안 일을 추진해왔다. 그런데도 자신의 정성이 모자란다고 생각한 것은 자기를 성찰할 줄 아는 참 선비의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1624년 세상을 떠나니 향년 62세였다.

끝으로 한몽삼(韓夢參)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자변(子變)이고 호는 조은(釣隱) 또는 적암은인(適巖隱人)이다. 아버지는 참봉 계(誡)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 몽룡(夢龍) 밑에서 학업에 정진하였으며, 박제인(朴齊仁)·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1639년(인조 17년) 선생의 학행이 조정에 알려져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버린다. 그 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관직을 멀리하고 산수가 수려한 파릉군(巴陵郡)의 서계(西溪)가에 은거하였다. 조은은 필법이 기이하고 굳세어 명성이 높았던 분이다. 인근에서 비석과 판본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더 얻기가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조은의 필력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데 진주 남강의 의암에 그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의암에는 논개의 충절을 기리어 정대륭이 전서체(篆書體)로 ‘의암(義巖)’이란 글자를 새겼고, 남쪽 면에는 조은(釣隱)이 해서체(楷書體)로 ‘의암(義巖)’이라고 새겼던 것이다. 조은은 25세 때 생원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산수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함안에 석정(石亭)을 짓고 바위에 새기기를, “시내와 바위를 좋아하는 벽이요 자연을 사랑하고 여행을 즐기는 성벽(性癖)이로다. 바위로 양치질 하고 냇물을 배게로 삼아 구름을 갈고 달을 낚노라”라고 새기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글씨를 판각하여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또 같은 고을의 적암(適巖)이 경치가 뛰어난 곳임을 알고 그 위에다 정자를 지어 스스로 호를 적암 조은(適巖釣隱)이라 했던 것이다. 아마도 적암에 은거하면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죠. 남인의 영수로 알려진 미수 허목 같은 선비도 조은을 찾아와 산수를 같이 즐기며 학문을 토론했다고 한다.

1659년에는 동몽교관에 제수 되었으나 1661년엔 정수리 옛집에 돌아와 이듬해 세상을 떠나니 향년 74세였다.

후일 미수 허목이 우의정일 때 조은의 손자 익세(翼世)가 올라가서 뵈니 미수가 이르기를 “내가 조은공과 더불어 창원에 갔을 때 회원에서 좋은 모임이 있었는데, 지금 지난 일을 생각하니 어제와 같은 데도 어진사람은 이미 없고, 나만 홀로 남았으니 어진 분에 대한 회포가 다 말할 수 없구나”하면서 조은을 생각했다고 한다. 1706년 묘소를 하동 흥룡리로 옮겼는데 현재 섬진강변 흥룡리에는 그를 기리는 모도재(慕道齋)가 있다.

이러한 임천서원이 오늘날까지 공식적으로 등록된 문화재가 아닌 비지정문화재로 되어있어서 안타까운 실정이다. 특히, 1759년에 지방유림들이 상소를 올려 사액(賜額)을 청하기도 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사액을 받지는 못했다. 비록 당시에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지도 못했고, 또 지금까지 공인된 정식문화재로 등록되지 못했지만, 조선시대 중기와 말기에 걸쳐서 대학자들인 진주출신의 오현(五賢)선생님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교육의 장소로써, 후대인들에게 지대한 학풍과 선비사상을 전승해주고 있다.

※본 란의 내용은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교실’에서도 강의되고 있는 교과내용입니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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