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손주 별명
[정용우칼럼] 손주 별명
  • 정용우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전 학부장
  • 승인 2022.01.12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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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전 학부장
정용우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전 학부장

오래 전, 내가 대학에 다닐 때 하숙을 했는데 그집 주소가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 334-52번지였다. 그 지번 때문에 우리 하숙집을 거쳐 간 사람들 모임명이 ‘334-52’다. 그 멤버 중에 강삼재라는 분이 있었다. 그 당시 경희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고 나중에는 5선 국회의원으로 집권당 사무총장까지 역임하셨다. 한자로 된 그분 이름은 姜三載.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분 위로 형 두 분이 계셨는데 맏형이 일재(一載), 둘째형이 이재(二載). 이런 식의 이름이었다. 그때는 자식을 많이 낳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이름이 흔했다. 우리 동네 이웃 면소재지에도 이런 식의 이름 지어진 분이 있었으니 일조(一兆), 이조(二兆), 삼조(三兆). 물려받은 가난이 지긋지긋하여 자식을 낳을 때 부자되라는 의미로 백(百), 천(千), 만(萬) 억(億), 조(兆), 이런 글자를 사용해서 이름 지은 경우다. 삼조(三兆)라는 이름도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이름을 가진 이웃 동네 삼조(三兆) 아저씨는 아버지보다는 몇 살 아래인데 그 당시 면사무소 소재지에서 푸줏간을 운영했다. 요새는 고기 수요가 많아 푸줏간에다 고기를 갖다 놓고 팔지만, 그때는 고기를 사먹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관계로 조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방문판매를 해야 했다. 우리집도 삼조 아저씨의 방문판매 대상이었다. 삼조 아저씨가 우리집을 방문했을 때마다 할아버지께서 “어이, 삼조 오셨는가?” 하고 인사를 건넸는데 우리에게는 그 인사말씀이 참 아름답게 들렸다. 오늘 고기맛을 볼 수 있는 날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런 이름 이야기를 꺼내는고 하니 요즈음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황에 처한 딸을 위로하기 위해서 손주들 별명을 붙여준 것과 관련이 있다. 내 딸이 2년 전 남편의 근무처가 있는 대전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 당시 전세계약 체결한 아파트 전세보증금이 턱없이 올라버려 재계약을 하기 위해서는 요샛말로 ‘영끌’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집 소유자가 아무리 갑의 입장에 있다해도 전세보증금 인상 폭이 너무 심하다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재계약하여야 하는 임차인 입장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주택임대차보호법 상 재계약 시 전세보증금 인상 폭 제한 등등의 규정은 있지만 실제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 역시 성큼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입장이 되지도 못하니 마음으로나마 딸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방안을 궁리해 보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각, 나에게는 4명의 손주가 있다. 내 딸과 아들이 각각 2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가 전셋집에서 산다. 태어난 순서대로 우리 부부는 손주들 별명을 붙여 부른다. 특히 경제적 부족과 결핍으로 인한 불만을 토로할 적마다 딸 아들 앞에서 더 자주 그렇게 부른다. 일조야, 이조야, 삼조야, 사조야 이런 식으로. 딸과 아들은 이 별명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는다. 그럴 때는 내가 잽싸게 묻는다. ‘너희 아들 딸, 일조와 바꾸겠냐?’ 역시 빙그레 웃기만 한다. 찬스다 싶어 다시 농담 한마디 더 보탠다. ‘우리 손주들 값이 10조네.’라고. 10조. 참 부자다. 나도 부자고 내 딸 아들도 부자다. 이렇게 한바탕 딸 아들 위문공연을 마치고 나면 괜히 뭔가 허전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딸 아들 위로하고 웃기느라 손주들 별명을 그렇게 불렀지만 원래 생명은 너무 귀하고 귀해서 아예 값을 매길 수 없는 것, 즉 ‘가격이 없는 것’.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고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인간 존재의 근원이다.’라고 헌법재판소가 선언했듯이 인간의 생명에 비견될 수 있는 가치 척도가 없는데도 손주들 생명 가치를 일조(一兆)니, 이조(二兆)니 값을 매겨 부른 그 자체가 생명에 대한 불경(不敬)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몇 달 지나면 나에게는 또 하나의 손주가 생긴다. 5번째 손주다. 생명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기에 새로 태어날 내 손주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우주다. 그래서 생명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신비롭고 경이적일뿐더러 경건하고 고귀한 일이다. 그 일을 내 아들 부부가 또 해낸다. 요즘처럼 아기 낳아 키우기 힘든 시절에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아들 내외가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그러면서도 한편 또 걱정이 앞선다. 아들 역시 전세기간 만기일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재계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전세보증금을 대폭 인상해주어야 할 것이기에 아들 내외가 겪을 경제적 고충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하여 이번에도 같은 방법의 위문공연이 필요할 듯하다. 이번에 탄생하는 손주는 5번째이니 우리 부부가 부르는 별명으로 ‘오조(五兆)’다. 도합 15조다. 부자가 된 듯하여 즐겁고 행복하지만 한편으론 안타깝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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