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雪中寒梅 하항(河沆) 선생을 기리는 대각서원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雪中寒梅 하항(河沆) 선생을 기리는 대각서원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4.05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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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선생 문하 여러 선비들이 한결같이 칭송
남명도 “내가 인재를 얻어 가르친다”고 할 정도

수곡면 사곡리에 위치…유학선현 6분 추가로 배향
조선후기 건축 여러 기법 볼 수 있어 학술적 가치

<21> 진주지역 서원(書院)과 선현(先賢) <3>

대각서원.
대각서원.

지금까지는 천년 진주를 상징하는 진주성과 촉석루에 비문이나 현판으로 기록된 충절과 의절중심의 인물들과 그들의 개인기록과 문집을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진주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수많은 서원(書院: 조선시대 각 지역의 고급교육기관)들 중에 전통 있는 몇몇 서원에 대해서 그 설립자의 인품과 학문성, 그리고 서원의 문화재적 가치와 관련해서 기술하기로 한다.

오늘은 두 번째로 진주시 수곡면에 위치하고 있는 대각서원(大覺書院)과 설립자인 이 지역 출신의 각재(覺齋) 하항(河沆) 선생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일찍이 하항은 남명이 그의 인품을 보고 설중한매(雪中寒梅), 즉, ‘눈 속에 핀 매화’같이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538년(중종 33년) 진주 수곡리(현 수곡면 효자리 정곡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晉陽)으로 자는 호원(灝源)이며, 아버지 풍월헌(風月軒) 인서(麟瑞)는 남명선생과 친분이 있었다. 형 환성재(喚醒齋) 락(洛)은 임란 때 상주성에서 아들 경휘(鏡輝)와 함께 순절하는 슬픔도 겪었던 분이다.

각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아버지의 명으로 후계(後溪) 김범(金範:1515-1566)에게서 처음 수학하게 된다. 후에 남명선생이 덕산으로 들어오자, 드디어 제자의 예를 갖추고 스승으로 섬겼으니, 남명선생이 ‘나의 벗’이라고 하면서 ‘내가 인재를 얻어 가르친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각재는 오로지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에 전념하면서 언행을 바르게 하니, 선생이 칭찬하면서 이르기를 “우리 고장에서 학문에 뜻을 둔 선비로서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이 사람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당시 수우당 최영경, 덕계 오건,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등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 모두 남명의 문하에 있어, 각재가 이들과 더불어 열심히 연마하여 학문을 성취시켰다. 수우당과는 기상이 비록 같지 않았으나 서로 매우 존중하였다. 수우당이 각재를 두고 이르기를 “호원(灝源)은 백사장의 백로 같은 사람”이라고 하여 기질을 칭찬하였으며, 각재 또한 수우당이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자 소를 올려 원통함을 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덕계 오건은 각재를 두고 “처사(處事)에 온건하다”하여 자질의 순후함을 말하였고, 한강은 “각재와 수우당은 기상이 비록 같지는 않지만, 대절(大節)에 임하여서는 지조를 굽히지 않는 것이 각재도 수우당 못지 않다”하여 지조가 굳은 사람임을 말하였다. 이같이 여러 선비들이 각재의 자질을 이구동성으로 칭찬하고 있음을 볼 때, 당시 지역 유림계에서 각재의 위치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30세 때 생원시에 일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이로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을 하였다. 각재는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갖추고 조용한 방에서 향을 피워 놓고 독서를 하였는데, 그 행동이 모두 소학과 일치한다 하여,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각재를 ‘진소학군자((眞小學君子)’라 불렀다. 일찍이 남명은 고원(高遠)한 척하면서 성리(性理)만 입에 담는 학자들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손으로는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하늘의 이치를 이야기하여 헛된 이름을 도적질하고 다른 사람을 속인다”고 하여 이론 중심의 학문에 치중하기보다는 실천을 중시하였다. 각재는 이런 남명의 학문 방법을 체득하여 평생동안 요체로 삼았던 것이다. 각재의 이러한 점을 두고 지금 이 지역 유림들은 “남명의 가르침을 충실히 전수받은 분은 수우당과 각재가 으뜸이다”라고 말한다.

32세와 34세 때 부모상을 연이어 당한 각재는 상을 치르는 예법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으며, 35세 때(1572년)는 남명선생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수개월 동안 곁에서 모시면서, 시주을 들었으며,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 3년을 입어 제자의 예를 다하기도 하였다. 1576년 스승 남명을 위해 학우들과 덕천서원을 건립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1578년 경상감사는 “진주에 사는 생원 하항 등은 학식이 정밀하고 밝으며 조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하여 이러한 내용을 조정에 알리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참봉의 벼슬을 제수하여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중년에 대각촌(大覺村) 각봉(覺峯)아래로 옮겨 초옥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이로 인해 호를 ‘각재’라 지은 것이다. 이때 각재에게서 글을 배운 사람들로는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 사호(思湖) 오장(吳長) 등이었다. 송정은 각재의 종질(從姪)로 문장에 출중했으며, 셋째 아들 관(瓘)은 각재 외아들 경소(鏡昭)의 양자로 들어가 그 뒤를 이었다. 오장은 덕계 오건의 아들로 임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였으며,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던 동계 정온이 제주로 유배되자 영남 유생들을 이끌고 상소를 한 인물이다. 각봉 아래에서 초옥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던 각재는 만년에 다시 옛날 살던 곳으로 돌아와 집을 짓고 ‘내복(來復)’이라 명명하여 여기서 생을 마감하였는데 이때가 1590년(선조 23)이니 향년 53세였다.

각재가 세상을 떠난 16년 후(1606년) 지역 사람이 사우(祠宇) 건립을 추진하여, 1610년 9월 5일 완성되었으니, 바로 대각서원이다. 비록 서원은 크지 않지만 매화꽃 같은 선생의 품향이 너무 짙어,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하다.

서원으로서 전체적인 배치가 무난하며, 부재의 사용이나 적절한 비례의 적용, 그리고 동재의 여러 가지 기술적인 수법 등 조선후기 건축의 여러 기법들을 볼 수가 있어, 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대각서원은 뒤에 무송 손천우, 백암 김대명, 영무성 하응도, 모촌 이정, 조계 유종지, 송정 하수일 등 6분의 유학선현을 추가로 모심으로써 현재 7분을 배향하고 있다.

현재 대각서원은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518번지 대각마을에 위치해 있으며, 1869년에 조선시대 학문가 각재(覺齋) 하항(河沆: 1538~1590)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이 지금의 서원은 서원이 세워진 그해 고종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된 것을 1918년에 복원한 것이다. 예로부터 이곳에 공부하여 대성한 선비들이 많았다 하여 ‘대각(大覺)’이라 불렀고, 서원 마을이라고도 한다. 마을 입구 오른편에는 ‘각재하선생유허비(覺齋河先生遺墟碑)’가 서있어 각재 선생의 유풍이 계속 이어져 오는 마을임을 보여주고 있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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