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평생 3000여점의 소 그림 그렸다”
[인터뷰] “평생 3000여점의 소 그림 그렸다”
  • 황인태 대기자
  • 승인 2022.02.11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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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문 제70회 개천예술제 제전위원장

앞으로도 소 그림 1000점 더 그리겠다는 목표 세워둬
어릴 때 싸움소 키우는 이웃집에 자주 놀러간 게 인연
74년 하던 금방에 도둑이 들어 하루아침에 알거지 돼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전업화가의 길로 들어서
그해 일본에서 전시회 열었는데 70여점 팔리는 대박
78년 제1회 경남도전서 대상 받아 본격적인 소 그려


초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공책에 그림 그리다가 선생님께 혼나
고등학교 때 이웃에 살던 박생광 화백에게 미술재능 인정받아
승자는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평생 노력하는 사람
우촌 최태문 선생 작품 '전진'
우촌 최태문 선생 작품 '전진'

최태문(80) 제70회 개천예술제 제전위원장은 평생 소를 그려온 사람이다. 선생의 호도 우촌(牛村)이다. 풀이하면 시골소라는 의미이다. 선생은 자신의 삶이 소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 평생 소를 그려 와서 그럴 수도 있고 원래 천성이 촌스럽고 소다워서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촌 선생은 지금까지 3000여점의 소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화단에서 소 그림 하면 자신의 이름을 조금은 알아준다고 했다. 우촌 선생은 자신의 소 그림에 대해 힘이

차고 용맹스럽고 근육질의 소를 주로 표현한다고 했다. 이렇게 근육질의 소 그림을 그리는데 대해 우촌 선생은 “어릴 적에 이웃에 싸움소를 키우는 집이 있었다. 그때 본 소에 대한 인상이 뇌리에 박혀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그 이유를 말했다. 싸움소는 싸움에 나가서 이기고 오면 기세가 등등한데 지고 오면 풀이 죽어 오는 것이 사람이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그대롤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어릴 적 보아온 그런 소의 모습이 평생 우촌 선생을 소 그림을 그리도록 인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우촌 선생은 자신의 인생도, 소를 그리는 것도 운명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그렇게 됐다. 또 소를 그리는 것도 운명적 만남이라고 했다.

선생은 초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공책에 그림을 그리다가 담임에게 혼이 났던 기억이 있을 정도로 그림을 좋아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이웃에 살던 박생광 화백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그림공부를 하게 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 못서, 하루아침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선생은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래서 귀금속 기술을 배워 72년 금방을 차렸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잘나가던 금방에 도둑이 들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됐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벌어야 했던 선생은 바로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운이 좋아 도둑이 든 그해 일본에서 전시회를 열었더니 전시작품 대부분이 팔려 거금을 벌었다. 이 돈으로 사업 빚을 다 갚은 선생은 본격적인 전업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아무리 다른 길로 가도 결국 운명이 화가의 길로 이끌었다고 선생은 말했다.

선생이 우촌이라는 호를 받은 것은 본격적으로 소를 그리기 전이라고 했다. 화가가 되기 전 진주에 자주 들렀던 백포 곽남배 선생이 자신에게 우촌이라는 호를 선물해 준 것. 그리고 선생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우촌이라는 호를 사용하고 있다. 백포선생이 미래를 보는 혜안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호를 받을 때는 소 그림과는 전혀 무관했다는 게 선생의 회고이다.

소를 그리게 된 계기도 인연이었다. 어릴 적 선생의 이웃에 싸움소를 키우는 집이 있었다. 어린이 우촌은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늘 싸움소 집에 가서 놀곤 했다. 싸움소는 싸움에 나가 이기고 오면 소도 우쭐해서 오고, 지고 오면 풀이 죽어서 오곤 했다. 사람처럼 소도 희로애락을 그대로 느끼는 동물이었다. 그런 소의 모습에 매료됐던 어린이 우촌은 평생 소를 그리면서 살게 됐다. 이처럼 우촌 선생은 자신이 화가가 된 것과 소를 그리게 된 것이 모두 운명에 의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우촌 선생이 본격적으로 소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1978년 제1회 경남도전에서 소 그림으로 대상을 받으면서 부터이다. 경남도전에서 소 그림으로 대상을 받자, 이름이 났다. 주변에서 소 그림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소 그림을 그리게 됐다.

우촌 선생은 지금까지 3000여점의 소 그림을 그렸지만 죽을 때까지 소 그림 1000점을 더 그릴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고 했다.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때그때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린다고 했다. 처음에는 생계를 위해 팔릴지 생각하면서 그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이 없이 그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우촌 선생은 자신의 소 그림에 대한 평가는 후세사람들에게 맡기고 그동안 공부하고 노력한 것을 갖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느낌으로 그린다고 했다.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소 그림을 그리며 살 수 있어서 자신의 인생이 행복했다는 우촌선생은 후배들에게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 승자라는 말과 함께 인내하고 노력하면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는 덕담을 남겼다.

우촌 최태문(80) 선생은 평생 소 그림을 주로 그려왔다. 현재까지 3000여점의 소 그림을 그렸다는 우촌 선생은 앞으로도 1000점을 더 그린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고 했다.
우촌 최태문(80) 선생은 평생 소 그림을 주로 그려왔다. 현재까지 3000여점의 소 그림을 그렸다는 우촌 선생은 앞으로도 1000점을 더 그린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고 했다.

다음은 우촌 최태문 선생과의 대담내용이다.

▲이번에 개천예술제 제전위원장을 맡으셨다. 이유가 있습니까.

-제 나이가 올해 80입니다. 하던 직책도 후배들에게 넘겨줄 때입니다. 그런데 개천예술제가 70회를 맞았다고 꼭 저보고 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도 70회라는 의미가 깊어서 수락을 했습니다.

▲개천예술제와는 인연이 있습니까.

-저하고는 인연이 깊습니다. 저도 개천예술제를 통해 화가로 등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개천예술제에 대해서는 애착이 갑니다.

▲올해 개천예술제는 언제 개최됩니까.

-11월 7일부터 11월 14일까지 8일간 열립니다.

▲방향은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코로나19로 인해 행사는 하지만 사람이 모이는 것은 되도록 피하는 방향으로 행사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늘 해오던 신진발굴의 맥을 이어간다는 정신으로 운영할 생각입니다.

▲개천예술제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여러 곳에서 개천예술제를 벤치마킹해 행사를 개최하기 때문에 그런 평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젊은 예술인들을 많이 배출했고 앞으로도 많이 배출될 것입니다. 이에 제70회 개천예술제 역사를 무시할 수 없다고 봅니다.

▲올해 예술제 행사 분야는 몇 개입니까.

-7개 분야에 43개 행사입니다.

▲개인적인 얘기입니다. 어떻게 해서 화가가 됐습니까.

-제가 1941년생입니다. 올해 나이가 만으로 80살입니다. 저는 제 인생을 보면 화가가 될 운영이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길로 갔는데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평생 화가의 길을 걷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걸 운명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고등학교를 진주농고를 들어갔습니다. 그때까지는 집안도 잘 살고 그림공부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시절에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실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을 하지 못하고 생업일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작년에 진주농고의 후신인 경남과학기술대학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어떤 생업일선인가요.

-요즈음으로 말하면 귀금속 공예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예술 아닙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화가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고등학교 다니다가 집안이 망해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진주에 있는 금방에 취직을 해서 귀금속 일을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22살 때인 1972년에 진주시 대안동에서 광명당이라는 금방을 열었습니다.

▲금방이 잘 됐나요.

-잘 됐습니다. 그때는 쥬얼리 디자인이 나오지 않을 때라서 사람들이 주로 금방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사업이 잘됐습니다. 처음에 금방에서 시작해 나중에 시계점까지 확장을 했을 정도입니다.

▲그럼 잘 사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사업이 잘 됐다면 저는 지금 화가라기 보다는 최 사장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됐단 말입니까.

-운명이 그게 아니었던 거죠. 금방을 하던 2년째인 74년 음력 설날 아침에 금방과 시계방이 몽땅 도둑을 맞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돼 길에 나 앉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생계형 화가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프로페셔널이었던 셈이었던 거죠.

▲금방을 하다가 그렇게 금방 전업 화가가 될 수 있습니까.

-물론 아무나 그럴 수는 없죠. 저는 금방을 할 때도 틈이 날 때 마다 어릴 때부터 배워온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도 하고 그랬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습니까.

-다른 금방에 기술을 배우기 위해 직원으로 있던 69년도에 ‘백양회’라는 중앙 공모전에 응모해 입선을 했습니다. 또 같은 해에 삼천포에서 개인전시회도 열고 그랬습니다. 금 세공기술을 배우면서도 화가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꾸준히 그림을 그려왔던 거죠. 그런데 몽땅 도둑을 맞아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의해 전업 화가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저는 제 운명이 화가의 길로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와서 보면 도둑이 든 것도 제가 화가의 길로 가도록 하늘이 움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잘나가는 금은방 사업가로 그냥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금방을 하다가 바로 전업 작가가 돼 돈을 벌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운이 좋았습니다. 금방이 도둑을 맞은 그해 5월에 일본에서 전시회를 열 기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그림 70여점을 전시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70%가 팔렸습니다. 나름 큰돈이었죠. 이 전시회 한번으로 그동안 사업하면서 벌여놓은 일들을 다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전업 작가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촌 최태문 선생이 소를 그리고 있다.

▲그림은 언제부터 배웠습니까.

-초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공책에 그림을 그리다가 선생님한테 혼난 기억이 납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혼자서 공책에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유심히 보신 아버지께서 이웃에 살던 박생광 화백에게 저를 데려갔습니다. 박 화백이 저의 그림을 보곤 싹수가 있다고 하시곤 그림공부를 시키라고 아버지에게 권했습니다. 그게 계기가 돼서 본격적인 그림공부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박생광 화백은 어떻게 알게 됐나요.

-아버지와 박생광 화백이 서로 친구지간이었습니다. 또 박 화백이 이웃에 살았습니다. 그때는 화가가 가난했던 시절이라 박 화백의 집이 아주 작았습니다. 우리 집이 망하기 전에는 제법 컸습니다. 그래서 큰 그림을 그리려면 박 화백이 우리 집에 와서 그리곤 하셨습니다.

▲그럼, 박 화백에게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운 겁니까.

-그렇습니다. 박 화백을 처음 본 이후 정기적으로 찾아뵙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이사를 간 이후에도 계속 찾아가서 배웠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쭉 배웠습니다. 박생광 화백이 제 그림의 스승입니다.

▲선생의 그림은 주로 소를 주제로 하는데. 무슨 계기가 있습니까.

-제가 어릴 때 살던 동네에 싸움소를 키우는 집이 있었습니다. 저는 주로 그 집에 가서 놀곤 했습니다. 그때 소가 처음 제 뇌리에 박혔습니다.

우촌 최태문 선생 작품 '도약'

▲그때 소 모습이 어땠습니까.

-싸움소는 일반소와 좀 다릅니다. 근육질에다가 키가 작고 뿔도 다릅니다. 또 소를 키우는데 호박, 인삼을 넣고 고와서 먹이고 그랬습니다. 소싸움에 나가서 이기고 오면 소가 어깨가 들썩들썩 할 정도로 기가 살아서 옵니다. 그런데 싸움에서 지고 오면 소도 풀이 죽어서 옵니다. 소도 사람처럼 희로애락을 아는 거죠. 그런 게 제 뇌리 속에 강렬하게 각인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런 모습들이 제가 평생 소를 그리게 된 인연이 되지 않았나, 그리 생각됩니다.

▲그리해서 화가가 돼서 본격적으로 소를 그리게 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1978년에 제1회 경남도전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소의 그림을 출품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대상을 받게 된 겁니다. 지금 경남도전은 8개 장르로 나누어 장르마다 대상을 줍니다. 그런데 그때는 대상이 전체에서 1개였습니다. 그걸 제가 받았던 거죠. 그렇게 되니 소 그림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이 나니 소 그림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소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생계의 일환이었던 거죠.

▲지금까지 소 그림을 몇 점이나 그렸습니까.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3000여점은 그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 그림 하면 이중섭 화가가 생각나는데.

-이중섭 화가는 유화이고 저는 한국화입니다. 유화가 표현하는 점과 한국화가 나타내는 점이 좀 다릅니다. 작가에 대한 평가는 후세의 몫입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의 세계가 있고 그분들은 그분들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의 소 그림을 스스로 평가하면 어떻습니까.

-저는 소를 그릴 때 힘이 차고 용맹스럽고 근육질의 소를 그립니다. 어릴 적 싸움소를 많이 봐서 그런지 근육질의 소가 좋습니다. 한국화는 여백의 예술이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여백을 어떻게 표현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저는 보통 50개의 선으로 소를 표현하려고 하는데 최근 들어서는 그 선을 줄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25개까지는 줄였는데 더 줄일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평생 소를 그려왔는데 선생도 소를 닮지 않나요.

-실제로 저보고 소를 닮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대상에 몰두하다 보면 사람도 닮아가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 정말 희한한 것은 제 호, 우촌(牛村)은 소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전에 받은 것입니다. 평생 소 그림을 그리고 살라고 이런 호가 지어졌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

▲우촌이라는 호는 언제 받은 겁니까.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 데 60년대 후반에 받았습니다. 그때는 금방기술을 배울 때라 소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전입니다.

▲누구에게 받았습니까.

-백포 곽남배 선생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전남 진도분인데 진주에 가끔 오시곤 했습니다. 그때는 기술을 배울 때라 제 사정이 비교적 넉넉할 때입니다. 그래서 선생이 진주에 오시면 제가 대접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를 닮았다고 생각하셨는지 우촌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습니다. 정말 우연입니다.

▲앞으로도 소를 그릴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소 그림 1000점을 더 그리자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습니다. 평생 소를 그리다가 죽을 생각입니다.

▲이렇게 원로작가가 되시니 화가란 어떤 직업입니까.

-최근 유행하는 드라마 오징어게임에서 깐부 역할을 맡으신 오일남 선생이 “인생의 진정한 승자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이루면서 내공을 지니고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입니다.”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저는 평생 소를 그리는 한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요즈음 후배들에게 인생이란 100m 달리기가 아니다. 마라톤이다. 참고 인내하고 죽은 후에도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보는 마음으로 살아라. 참고 인내하고 가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말을 가끔 합니다. 제가 살아보니 그랬습니다. 대담 황인태 회장

우촌 최태문 선생 작품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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