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새 생명 그리고 어느 하루
[정용우칼럼] 새 생명 그리고 어느 하루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학부장
  • 승인 2022.03.22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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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전 학부장
정용우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전 학부장

내가 사는 이곳 지수는 전국에서도 우엉 재배지로 유명하다. 내 초등학교 동창 친구도 우엉농장을 크게 운영하고 있다. 이 친구가 우엉차를 만들어 나에게 갖다주었다. 이 우엉차가 당뇨병에 좋다면서. 그래서 나는 우엉차를 즐겨 마신다. 우엉차 한 잔, 그리고는 일과의 시작이다. 오늘은 진주 시내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아내와 손주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보통 때 같으면 옷만 갈아입고 시내버스 시각에 맞추어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준비가 필요하다. 이번처럼 몇 개의 병이 한꺼번에 몰려왔을 때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몸을 씻는 것조차도 귀찮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면 몸에서 ‘노인 냄새’가 날 수도 있기 때문에 깨끗이 샤워부터 해야 한다. 옷도 갈아입는다. 그리고는 시내버스를 타고 진주로 들어간다. 아내와 손주들을 만나기에 앞서 이발부터 한다. 이 모든 절차를 마치면 제법 깔끔하게 보인다. 아픈 사람 같지 않다. 깔끔하게 자신을 단장하는 것. 어린 새 생명들을 만나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의무 중 하나일지 모른다.

약 2주 만에 아내가 대전서 이곳 진주로 내려왔다. 어제 하루를 아들네 집에서 보내고 오늘 나와 만난다. 점심 식사 전에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다. 아내는 다음 달, 한 돌을 맞는 어린 손주는 등에 업고 그보다 두 살 위인 손주(손녀)는 앞서 세워 나를 맞기 위해 마중을 나왔다. 멀리서 나를 알아보고 손주는 몇십 미터를 뛰어 달려온다. 나도 손주를 향해 달려간다. 마침내 나는 손주를 안아 하늘로 치켜올린다. 하삐(우리집에서는 할아버지를 이렇게 부른다)와 손주의 만남이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며, 생명과 생명의 만남이다. 손주를 안은 채 내가 이야기한다. “하삐는 우리 예쁜이가 참 보고 싶었어요.” 이에 어린 손주가 답한다. “나도 하삐가 많이 보고 싶었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보기 좋았는데 이를 촬영해놓지 못해서 아쉽다고 아내는 이야기한다.

아내가 나에게 또 이야기한다. “우리 예쁜이, 하삐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예쁜이 단골집이예요.” GS25 편의점이 단골집이란다. 태어난 지 3년도 안 된 어린애가 자기가 좋아하는 과자와 음료수 10여 종류를 진열대 곳곳에서 찾아내어 계산대 앞으로 가져온다. 참 신기하다. 아무리 단골이라고는 하지만. 과자와 음료수를 사들고 집으로 향한다. 이제는 손주가 좋아하는 탕수육을 먹을 차례다. 아들이 미리 주문해 놓았기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식사가 가능했다. 탕수육을 참 맛있게 먹는다. 맛있게 먹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이렇게 아들집에서 손주들과 함께 보내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러나 얼른 일어서야 했다. 조금 더 지체하면 반성장이 파할 시간이다. 부리나케 나와 아내는 집을 나와 반성장으로 향한다. 낮이 길어져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장이 서 있었다. 아내는 이것저것 반찬거리를 산다. 그중에는 우엉도 들어 있다. 우엉볶음요리를 할 재료이다. 내가 즐겨 먹는 요리 중의 하나. 아침 우엉차 마시기, 오후 우엉반찬거리 구입. 해거름에 또다시 이어지는 우엉밭 주변 산책 이야기...

느지막한 오후,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마친다. 저녁식사 후 강둑길 산책을 나선다. 저녁식사를 마쳤건만 춘분이 지나서 그런지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었다. 강둑길에 접어들기 바로 직전에 엄청 넓은 우엉밭이 있는데 그 주변을 지나면서 아내가 말한다. “여기에 우엉이 심어져 있었군요.” 2주마다 이곳 시골을 다녀가는 아내 입장에서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었다. 지난 늦가을 이 밭에 무언가가 심어져 싹이 돋아나더니 겨울을 지나면서 그 싹들이 모두 얼어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어린싹들이 한겨울 모진 추위를 견뎌내지 못해 죽어버린 것처럼 말라버린 상태에 있지만 사실은 늦가을에 파종된 우엉이 잠깐 싹을 틔워 얻어낸 생명의 기운을 조그마한 뿌리에 저장해 놓고는 잎은 말라버린 채 숨죽여 겨울을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잎이 보이지 아니하니 아내처럼 농촌 사정에 밝지 아니한 사람 입장에서 보면 무엇을 심어놨는지 알 수 없게끔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춘분을 지나면서 잎사귀들이 내 어린 손주들 손바닥만큼이나 자라나니 아내는 이 잎들을 보고 이제사 이 밭에 우엉이 심어져 있음을 알아챈다. 움직이지 못하고 죽은 것 같지만,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햇볕이 언 땅을 녹여내면 우엉들은 이렇게 각자 뿌리에서 생명의 기운을 내뿜는다. 아내도, 나도 우엉밭 곁을 지나면서 기원해 본다. 지난겨울 내내 병고에 시달리며 움츠러들었던 내 몸도 이제 봄을 맞아 우엉들처럼 새 생명으로 피어나기를. 그리하여 한창 새 생명으로 피어나고 있는 내 어린 손주들과 함께 생명의 춤을 출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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