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죽음은 되돌아가는 것
[정용우칼럼] 죽음은 되돌아가는 것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2.04.05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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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3월 말부터 우리 집 주변 화단에는 꽃들이 경쟁적으로 피어난다. 지금 시절 4월 초, 우리 집 화단에서 피는 꽃들 중 단연 압권은 동백꽃과 벚꽃이다. 동백꽃이 약간 기운을 잃어갈 때쯤이면 벚꽃은 절정이다. 벚꽃은 피기 시작하여 며칠 지나면 바로 져버리기 때문에 나는 요 며칠 매일 기도했다. ‘꽃들아 며칠만이라도 지지 말아다오’. 2주 만에 이곳으로 오는 아내가 저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의 기도 덕분인지 아내가 금요일 오후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쯤 벚꽃은 거의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우리 집 벚나무는 심은 지 20년이 넘어 가지들이 뻗어나간 기세가 대단하다. 벚꽃이 만개하면 우리 집 전체가 환하게 느껴질 정도다. 때마침 바람이라도 살랑거리며 불어댈 때에는 그야말로 꽃눈 세상이다.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벚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환상의 세계다. 떨어진 벚꽃이 쌓여 나무 아래 그리고 잔디밭이 온통 하얗다. 겨울에 눈이 내린 것처럼. 아내는 이들 모습을 사진에 담기 바쁘다. 나무에 달려 있을 때도 아름답지만 이렇게 땅에 떨어져 쌓여 있어도 아름답다. 그래서 사람들은 ‘꽃이 두 번 핀다’고 이야기했으리라.

이렇게 아내는 피어있는 꽃, 떨어져 있는 꽃 모두를 마음껏 즐긴 후 다음 날 대전으로 떠나갔다. 이제 나 혼자 남았다. 건강한 혼자가 아니라 나이 들고 병든 혼자다. 혼자 거실에 앉아 떨어진 꽃들을 바라보는 나, 어제 아내와 함께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에 사로잡힌다. 다시 외롭고 처량해진다. 이런 신세가 되어 낙화를 바라보는 내 심정, 아름다움보다는 소멸의 이미지가 더 가깝게 다가온다. 그래서 동백꽃이 처절한 죽음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고, 벚꽃이 떨어져 내릴 때를 ‘죽기 좋은 때’(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주인공이 적탄에 맞아 죽어갈 때 쏟아지는 벚꽃을 바라보며 한 말)라고 표현한 지 모르겠다.

사람에 있어 소멸은 죽음이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 누군가가 이 죽음을 맞을 때 우리는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죽음에 대한 이러저러한 표현 중 이 표현이 가장 좋다. ‘돌아갔다’는 말은 ‘왔다’라는 말을 전제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말이다. 죽음이 그냥 허무로 끝나지 않고 ‘온 곳’으로 다시 가는 것이니 이 얼마나 좋은가.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라는 시를 기억해내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이 시인의 시비(詩碑)가 지리산 중산리 입구에 세워져 있다. 오래 전, 내가 병이 나서 이곳 고향에서 요양생활을 할 때, 몇 차례 그곳을 방문하여 시비(詩碑)를 돌면서 이 시를 외웠던 기억이 새롭다.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천상병의 시 ‘귀천’ 부분). 천상병 시인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소풍이다. 소풍날 먼 길 걸어 강변 모래사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도시락 까먹고 노래자랑과 보물찾기를 하다가 해 저물면 정리 정돈한 뒤 오던 길을 되돌아갔듯, 지금은 생의 놀이가 한창이지만 도도한 삶의 취흥도 이내 곧 시들어 마침내 삶이 종착에 이르게 되는 날이 올 것인즉 그때는 사느라 어지럽힌 자리 치우고 정(淨)한 몸으로 귀천해야 하리. 집착을 끊어낸 시인의 진면목은 낯설면서도 친근하다.

이 시뿐만 아니다. 내가 이 ‘돌아간다’는 표현을 좋아하다 보니 어디에서든 이 표현만 나오면 잊지를 못한다. 내가 아주 좋아해서 자주 보는 영화 ‘사막의 라이온’, 여기서도 이 표현이 나온다. 이 영화에서 보면 현대식 장비로 무장한 제국주의 침략자 이탈리아군에 맞서 그렇게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배드윈족의 뛰어난 지도자 요마르 무크타르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 요마르 무크타르도 이탈리아군의 집요한 추적에 결국 체포되어 공개리에 교수형에 처해진다. 교수형이 집행되기 전날 오마르 무크타르가 한 기도. “하느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내셨으니, 나 이제 하느님께로 돌아가야지.” 나는 이 오마르 무크타르의 기도를 듣고 가슴으로 음미하기 위해 몇 번이나 영화의 그 부분을 재생해 보았는지 모른다.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기도였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비록 육체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영혼은 여전히 건재하여, 본래 살던 곳인 하늘나라로 다시 돌아간다는 믿음의 표현일지니... 신앙이란 저런 거구나. 그런 신앙인만이 사형집행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담담할 수 있으리라. 삶과 현실에 대한 애착과 욕망을 초월한 삶이다. 삶에 죽음이 있고, 죽음에 삶이 있다고 했으니 이런 죽음을 택한 사람들의 삶은 아름답다, 병든 자, 나의 벚꽃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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