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진주지역 서원(書院)과 선현(先賢)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진주지역 서원(書院)과 선현(先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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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19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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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진주지역 서원(書院)과 선현(先賢) <5>

◆창원 황씨 선대 명인들을 모신 사당 東山齋

진주시 대평면에 위치 조선시대 건축 전형적 양식
恭僖公 황석기 등 위패 봉안 음력 10월15일 제향

진주시 대평면 신풍길에 위치한 동산재.
진주시 대평면 신풍길에 위치한 동산재.

1680년 창원 황씨 문중에서 건립한 사당인 동산재는 1983년 7월에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 1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진주시 대평면 신풍길 370에 위치하고 있는 동산재는 조선시대의 유적건조물과 주거건축의 전형적인 모습과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 건축을 연구할 수 있는 매우 적합한 건축자료라고 볼 수 있다.

원래 동산재는 진주시 대평면 신풍리 936번지에 있었던 것을 남강댐 공사로 인해 1995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건물들로는 동산재, 부속사, 세덕사, 문봉헌이 있고 정문인 조양문과 세덕사 정문인 추원문이 있기도 하다.

동산재에는 공희공(恭僖公) 황석기, 공정공(恭靖公) 황상, 도은공(道隱公) 황준, 회와공(晦窩公) 황윤의, 일신재공 황우(黃瑀), 신포공 황여필(黃汝弼)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는 곳이다.

공희공 황석기는 창원 황씨의 회산군계(檜山君系)파의 파조이다. 공회공은 본래 중국 사람이었으나, 고려 충숙왕 때 노국공주를 따라서 우리나라에 온 공로로 창원(昌源)을 봉하니 자손들이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공희공의 묘비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남으로 내려갈 때, 공은 아들 상(裳)과 함께 왕을 모시고 따랐으며, 돌아와 공을 논함에 부자가 아울러 공신이 되고 번갈아 재상의 자리에 오르니 일세에 빛나더라’라고 쓰여 있다. 동산재에 배향되어 있는 인물 중에는 공정공 황상(1328~1382년)의 업적이 가정 특출하다. 공희공의 장남으로 시호는 공정(恭靖)이며 고 충혜, 충목, 충정, 공민왕, 우왕 5왕조를 섬겼던 무장이다. 무예가 뛰어나 역대왕의 총애를 받았고, 특히 궁술이 뛰어나 원나라 순제(順帝)앞에서 시범을 보였는데 순제가 크게 탄복하였다고 한다. 또한 공정공은 1354년(공민왕 3년)에 원나라의 요청으로, 유탁(柳濯), 최영(崔瑩)등과 함께 장병2천을 거느리고 장사성(張士城)의 난군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으며, 1356년 기철(奇轍)일과를 숙청하는데 가담하여 추밀원 판사에 올랐다.

1362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피난할 때, 왕을 호위한 공으로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 도만호(都萬戶)가 되어 안우(安祐)와 함께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서울(개성)을 수복하여, 찬성사 상의(商議)에 오르고 회성(檜城)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1377년(우왕 3년) 의창군(義昌君)에 봉해져 서강도원수(西江都元帥)가 되어, 이성계를 비롯한 10여명의 장수를 부장으로 삼아 왜구를 방어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고 한다. 1382년(우왕 8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지금의 동산재에 배향되었다. 또한 공의 후손 황형(黃衡: 1459~1520년)은 1480년(성종 11년)에 무과(武科) 및 진현시(進賢試)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을 지냈으며, 전라좌도 방어사 시절인 1510년(중종 5년)에는 삼포왜란(三浦倭亂)을 맞아 적을 크게 물리침으로써 경상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된 분이다.

◆조선중기 학자 鄭暄이 말년에 머문 孤山亭

벼슬 뿌리치고 인근 문인들과 교류하며 학문 정진
진주 대평 고산에서 진양호 숭상으로 현 위치 이전

진주시 대평면 대평로 57번길에 위치한 고산정.
진주시 대평면 대평로 57번길에 위치한 고산정.

진주시 대평면 대평로 57번길에 한적한 격조와 품격있게 자리 잡은 고산정(孤山亭)은 1983년 7월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받은 진주지역에 전통있는 조선시대 정자이며 서원이기도 하다.

본 서원은 조선 중기의 학자 학포(學圃) 정훤(鄭暄)이 말년까지 매우 외롭게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던 곳으로 바닥을 높게 띄워 올리고 5량구조 팔작지붕을 한 소로수장(小櫨修粧) 집이다.

지붕 네 귀에 8각 기둥 모양의 활주를 사용하여 추녀를 받고 있으며 부연(婦椽)이 없는 홑처마를 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되어있고, 앞뒤로 툇간을 두었는데 좌우 양쪽에 1칸씩 큰 마루를 두어 정면과 좌우 3면에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뒤 사당은 두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이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평면의 앞쪽에만 좁은 툇간을 둠으로써 여타 다른 정자나 서원에 없는 특색을 갖고 있기도 하다.

고산정은 진주 대평의 고산에 위치하였으나 진양호의 수위상승으로 왕래가 어려워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학포는 1588년(선조 16년)에 합천 종간리의 영일 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라면서 선대 학자인 포은 정몽주의 후손임을 자긍심으로 삼았으며 호를 ‘학포’라 지은 것도 포은을 배우고 따르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35세 때 선대 때부터 살아온 단성으로 이주하여 10년 정도 살다가 44세 때 진주 고산(孤山)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학포재’를 지었다. 지금의 명칭이 ‘고산정’이라 한 것도 이곳의 그 당시 지명이 고산이었기 때문이다.

학포의 뛰어난 문장력과 덕행은 전국에 널리 알려져 53세(인조) 때 활인서 별제를 제수하였으나 사퇴하였고, 56세 때 조정에서 다시 영산현감을 제수했으나, 학포는 분수에 넘치는 은혜라고 생각하여 이를 사양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학포는 이처럼 명예를 탐하지 않았으며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요양차 학포재를 찾아온 친구를 죽을 때까지 돌보았던 우정이 깊은 분이었다. 그리고 인근의 문인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하면서 학문에 정진하다가 고산정에서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학포의 묘소는 산청군 하정리 비나리 소관동에 있는데 묘비에는 ‘徵士學圃鄭先生之墓(징사학포선생지묘)’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징사(徵士)’라는 말의 뜻은 학문과 덕망이 높은 선비를 의미한다. 그 후 진주 옥산서원에서 위패를 모시고 제를 지냈는데, 옥산서원은 포은 정몽주 선생이 고려 공민왕 23년에 진주 비봉루에 머문 것을 기리기 위해 1830년에 후손들이 창건한 서원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65년 지금의 하동 옥종으로 자리를 옮겨 세우게 되었다.

고산정이라는 이름처럼 고독함과 외로움이 깃든 이곳은 진양호 조성공사로 주변지역이 물에 잠기면서 이름 그대로 호수 속의 섬이 되어버렸다. 후손들은 고산정 이건사업을 추진하였으며, 현재의 고산정은 대평리 두시동으로 이건하여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진양호의 자연섬이 되어버린 옛날의 고산정은 지금은 터만 남아 있으며, 낙동강유역환경청이 야생동물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수달 전용 번식 시설을 설치함으로써 영원히 사람들의 발길이 닫지 않는 고독한 섬이 되어버렸다.

※본 란의 내용은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교실’에서도 강의되고 있는 교과내용입니다.

강신웅

본지 주필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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