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사라져 잊혀진다는 것
[정용우칼럼] 사라져 잊혀진다는 것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2.05.25 13: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오늘은 조부모님, 부모님 기일제사일이다. 코로나로 인한 풍습의 변화 탓도 있겠지만 내가 이곳 시골로 이사를 하고나서 타지에 사는 동생들이 이 먼 시골에 오고가기가 힘들 것 같아 하루에 모아 제사를 모시기로 했다. 어머니 돌아가신 날이 제일 앞서 이날에 함께 모신다. 이때가 되면 조부모님, 부모님과 가족공동체를 이루어 살던 시절이 그리워 옛 사진첩을 뒤적인다. 조부모님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전, 내 처삼촌께서 진주시 로타리클럽 회장으로 계실 때 일본 단체여행을 가셨는데 그 당시 누구나 갖고 싶어 하던 비디오카메라를 한 대 사오셨다. 처음 보는 물건이라 참 신기했다. 이야기 중 늙으신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손주 5남매를 키워주신 은공이 너무나 가슴에 맺혀 살아계실 때의 모습을 활동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삼촌에게 이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선뜻 빌려주셨다. 비디오카메라를 할아버지께 보여드리고 할아버지 생전 모습을 활동사진으로 남겨두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뜻밖에도 반대하셨다. ‘사라져 잊혀져가는 것이 삶의 순리요. 자연의 이치’라는 취지의 말씀을 해주시면서 이에 역행하는 활동사진은 안 되고 그냥 사진 한 장 찍도록 허락하겠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할머니와 함께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 한 장. 그 사진이다. 나는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사라져 잊혀진다는 것’을 별 거부감 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여 나의 은퇴식에서 학생들에게 한 마지막 인사도 ‘물러나면서 영광, 사라지면서 자유, 잊혀지면서 평화!’라는 구호로 끝을 맺을 수 있었으리라. 그게 벌써 3년 전 일이다. 그런데 이 구호와 비슷한 이야기를 요즘 또다시 듣게 되었으니 그 말씀의 주인공은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나는 제법 인연이 깊은 편이다. 내가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처음으로 하숙집을 정했는데 그곳이 ‘종로구 연건동 315번지’였다. 그곳 하숙집은 2층집이었는데 1층은 주인 가족들이 살고 2층은 하숙생들을 들였다. 그런데 그 당시 서울 상대 다니던 진주고 어느 선배분이 나를 그 집으로 데려갔는데 이 하숙집에 경남고 25기 졸업생이 많았다. 내 룸메이트 역시 경남고 25기로 졸업한 나보다 2년 선배였다. 경남고 출신 선배들이 몇몇 하숙을 했으니 동문회나 야구대회 등이 끝난 후 문재인 선배를 비롯한 친구분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하숙집으로 모여들었다. 2년 선배들이라 나는 대화에는 끼어들지 못하고 심부름꾼 역할만 한 셈이지만 그래도 형들 옆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즐겼다. 게다가 같은 대학교 동학이라는 또 다른 관계, 도서관이나 길에서 만나면 “어, 정용우! 잘하고 있지!”하면서 격려도 아끼지 않으셨다.

다시 하숙집 이야기. 아버지 돌아가시고 군 제대한 후 학교 가까이로 하숙집을 옮겼는데 그곳의 주소가 ‘동대문구 이문동 334-52번지’였다. 그때 하숙집 멤버 중에 강삼재 형이 경희대학교 총학생회 회장이었고 문재인 선배가 총무부장이었으니 이런저런 모임 등으로 바람 잘 날 없었다. 학교가 시국사건 등으로 시끄러웠던 만큼 하숙집 역시 시끄러웠다. 시끄러웠던 만큼 기억에 남는 추억거리도 많다. 하숙집을 연결고리로 하여 만들어진 추억들, 그 속의 인물들. 문재인 선배는 대통령이 되었고, 강삼재 형은 국회의원 5선으로 집권당 사무총장까지 했다. 그 외에도 대사, 변호사, 한의사, 치과의사, 음악평론가, 대학총장, 고급공무원, 나를 포함한 여럿이는 대학교수, 그 외 기업체 대표 등등. 40년이 지난 지금도 모임을 갖고 상호 연락하면서 좋은 친구 선후배가 되고 있는데 다만 문재인 선배는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면서 연락이 끊겼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였지만 그간의 추억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 것. 한때의 인연이었지만 그 인연 때문에 문재인 선배가 대통령이 되고, 그리고 내가 경상도 지방 시골로 이사하고 난 후부터 내 마음고생도 덩달아 이어졌다.

대통령이 펼치는 정책은 호불호(好不好)가 따르기 마련이다. 나도 문재인 대통령이 펼친 정책에 반대하는 경우도 많다. 정책은 어차피 선택의 문제인지라 반대와 비판은 어쩔 수 없다. 반대와 비판은 인정하지만, 욕설 수준의 비난과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낄 정도의 비아냥거림이라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이게 나의 가슴에 고통으로 남았다. 이제 물러나서 잊혀진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셨으니 내 마음도 가벼워지고 고통에서도 해방되리라. 그런데 사라져 잊혀진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일 터.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워야만 가능할뿐더러 정치라는 게 상대가 있는 만큼 본인 의도대로 흘러가 줄 수 있을지 그게 걱정스럽기는 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대로 988, 4층 (칠암동)
  • 대표전화 : 055-743-8000
  • 팩스 : 055-748-14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선효
  • 법인명 : 주식회사 경남미디어
  • 제호 : 경남미디어
  • 등록번호 : 경남 아 02393
  • 등록일 : 2018-09-19
  • 발행일 : 2018-11-11
  • 발행인 : 황인태
  • 편집인 : 황인태
  • 경남미디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미디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7481400@daum.net
ND소프트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이선효 055-743-8000 74380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