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낙화 직전의 꽃처럼
[정용우칼럼] 낙화 직전의 꽃처럼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2.05.3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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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는다. 봄가뭄이라 할만하다. 식물들이 수분을 공급받지 못해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자기 할 일은 철저히 해낸다. 꽃 피우는 일도 그중의 하나일 터. 가뭄을 이겨내면서도 지금껏 달려있는 꽃들이 대견스럽다. 그러나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이들 꽃 또한 떨어져 흘러내릴 것이다. 꽃이 죽어야 비로소 그 자리에 열매가 생긴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떨어져 흘러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때가 되어 흘러내리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제 내 한 생애 할 일 다 했으니 하늘이 정해준 다음 순서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다 한 채 그냥 떨어져 흘러내리기만을 기다리는 꽃. 아름다움의 극치다. 그런 점에서 꽃의 절정은 낙화(落花) 직전이라 할 수 있겠다. 필 때보다 질 때 더 아름다운 생멸(生滅)의 미학이랄까. 미당 서정주가 ‘더없이 아름다운/ 꽃이 질 때는/ 두견새들의 울음소리가/ 바다같이 바다같이/ 깊어만 가느니라’고 노래한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연과 세상의 이치를 아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울림!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으니 떨어지지 않는 꽃이 없듯이 죽지 않는 사람도 없다. 노년에 접어든 나는 머지않아 꽃들처럼 흘러내릴 것이다. ‘낙화(落花) 직전’이 지금의 나에게 그대로 들어맞는 말일지니... 머지않아 꽃이 가지와 줄기에서 떨어져 나가 소멸하듯이 나 또한 머지않아 이 세상을 하직하여 소멸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하다. 얼마 남지 않은 불투명한 삶에서 내일을 기대하기보다는, 지금을 더 소중히 여겨 갈무리 해나가야 한다. 지금이란 현재 뒤에는 그 어떤 것도 생생하지 않고, 이 현재 앞에서는 모든 게 불확실하다. 확실하게 여기 있는 것은 현재라는 짧은 순간뿐이다. 하여 이 현재라는 짧은 순간순간을 당당하게 살아야겠다. 당당하게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즐기며 사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돈의 노예, 시간의 노예, 일의 노예가 되어 살지는 않았는지 지난 삶을 되돌아본다. 먹고 살고 자식 키우고 출세하기 위해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아왔다 하더라도 이제 낙화 직전의 꽃들처럼 내 노년의 삶을 절정의 아름다움으로 가꾸어나가야겠다. 다행스럽게도 은퇴 후 몇 년의 삶은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최근 들어 문제가 생겼다. 내 몸에 이런저런 병이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병이 달라붙으니 삶이 고통스럽다. 한순간에 지금까지 다그쳐왔던 각오들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내 인생 낙화 직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기 위한 노력은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즐거움은커녕 두려움만 늘어난다. 이렇게 소중한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만 가니 안타까움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질병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 탓이다. 병이 있다면 있는 대로 그것을 껴안고 주인으로서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됨을 포기하고 병에 종속되고 구속됨으로써 내 삶의 당당함을 잃어버렸다. 내가 어리석고 용기가 부족한 탓이다.

세상에는 심한 질병을 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인된 자로서 당당하게 삶을 개척함으로써 그야말로 낙화 직전의 꽃들처럼 절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자들이 많다. 우리가 잘 아는 ‘실낙원’ ‘복락원’의 저자 존 밀튼은 만년에 각고의 면학으로 눈에 병이 나서 완전한 장님이 되었다. 전맹이기는 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이 위대한 저술을 아내와 딸들의 구술필기에 의해서 이루어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4월 73세로 별세한 영성 신학자 마르바 던, 이 사람처럼 자신의 몸에 숱한 만성질환을 지니고 살았던 이가 또 있을까. 장중첩증으로 장 절제를 했고 자궁내막증에 따른 자궁 적출, 그리고 유방암으로 인한 절제 수술을 받았다. 망막 출혈 이후엔 세 번의 눈 수술을 받았는데 한쪽 눈은 실명했다. 신장은 25%밖에 기능하지 못했고, 장 신경세포가 죽어 있어 항상 네 종류의 약을 먹었다. 수십 년간 팔과 다리 수술을 받았다. 다리뼈는 퇴행해 무릎 아래 신경은 죽어 있었다. 어릴 적 앓았던 홍역 후유증으로 췌장이 망가져 45년을 당뇨 합병증과 싸워야 했다. 던은 육신의 고통에도 캐나다 밴쿠버 리젠트칼리지에서 신학을 가르쳤고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의 책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 ‘약할 때 기뻐하라’ 등은 자신의 질병을 공개하며 써 내려간 책들이다. 일반인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기쁨과 희망을 찾은 사람들. 고통 속에서도 당당하게 삶을 개척하여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절정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그들. 낙화 직전의 꽃을 닮았다. 나도 그들을 닮고 싶은 마음에 낙화 직전의 꽃 하나를 조용히 응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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