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고양이
[정용우칼럼] 고양이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2.06.2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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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예전에 내 할머니께서 살아계셨던 시절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고양이는 대접을 제대로 받았다. 할머니는 고양이를 무척 사랑하시어 꼭 자식처럼 아끼셨다. 물론 먹거리도 사람 수준은 아니더라도 잘 대접받았다. 할머니 기거하시는 방에서 잠도 같이 잤다. 할머니한테서 사랑받는 만큼 재롱만 떨어주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두고 ‘수상록’의 저자 몽테뉴는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을 우리에게 전한다. ‘내가 고양이와 희롱하고 있자면,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누가 알 것인가?’

여기에는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인간과 고양이 간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를 논하는 대목이다. 우리 사람들이 고양이와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것은 고양이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반론을 편다. 고양이와 우리 사이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된 결함이 고양이 그들에게 있고, 우리에겐 없다고 보는 것은 잘못됐다. 당연히 우리에게도 책임의 절반이 있다. 왜냐하면 고양이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우리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유로 우리가 그들을 짐승이라고 보는 만큼, 그들도 우리를 짐승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면서.

위 두 이야기는 결국 인간과 고양이의 대등성(對等性)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보통사람들은 감히 고양이를 우리 인간과 대등하다는 차원에서 다룬 그 자체가 우리 인간의 우월성, 존엄성을 무시한 견해라고 반박할 것이다. 나도 우리 보통사람들의 이 견해에 일응 동조한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이 좀 더 냉정하게 판단해 보면 몽테뉴의 견해가 완전히 틀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 사람 대다수는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우월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그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죄악, 질병, 우유부단, 번민, 절망 등 그를 압박하는 불행의 주요 원천이 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가 마음대로 짐승들을 포획하고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뜻에 달려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우리 인간의 우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우월성이 우리 인간 간에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면 나는 기꺼이 이를 인정할 용의가 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잔혹한 사례들은 무수히 행해졌고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우월성이라는 장점, 역시 내세울 게 못 된다, 잠깐만 우리 주위를 둘러봐도 힘 있는 자들이 자신의 명예와 자본 이득을 위해 힘 약한 자들의 생명과 인권을 짓밟고 유린하는 사례를 수없이 접할 수 있다. 그 방법이 교묘하고 악랄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한다. 결국 우리가 주장하는 인간의 우월성도 우리 필요에 따라 그렇게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늘도 우리 동네에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은커녕 버림받아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 채 동네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고양이들로 넘쳐난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고양이일 정도다. 동네 간이도로는 물론이고 집 마당에서도 어슬렁거린다. 고양이가 많다 보니 영역다툼도 심하다. 어떨 때는 그들 간 싸움도 불사한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서 밖을 내다보면 물고 뜯고 난리다. 그냥 어슬렁거리거나 그들 간 싸우는 것은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니니 그래도 괜찮다. 그런데 똥과 오줌을 아무데나 싸대는 것은 문제다. 자기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경고의 뜻이 담겨 있는 모양인데 이 똥 – 오줌은 보이지 않으니 그냥 넘어 간다 – 은 매일 내 손으로 치워내야 한다. 여간 수고스럽지 않다. 내가 잔디밭 위에 똥 싸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일러두었는데도 이들은 막무가내, 계속 싸댄다. 나를 귀찮게 하는 저 고양이놈을 패주고 싶다.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고양이들을 몽테뉴처럼 생각하며 대등하게 대접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지만 손주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와서 고양이들과 같이 동무되어 비린내 나는 고깃덩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희롱거릴 때만은 내 생각이 달라진다. 손주들과 희롱거리며 잘 놀아줄 때는 이들 고양이가 예쁘다. 그러한 순간에는 몽테뉴식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고 싶어진다. 대등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인간의 오만한 허영심을 잠시 잠재워보는 것. 대자연 속에선 우리 인간이나 다른 동물이나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같은 법과 운을 받기에 서로 간에 우쭐댈 것도, 비굴할 것도 없다는 뜻. 장자(莊子)가 “천지가 넓어 고루 생육하고 만물만사 많아도 하나로 다스려진다(天弘地廣化均隆 物衆人多治一通)”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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