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선풍기
[정용우칼럼] 선풍기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2.08.1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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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요즘엔 말라리아가 모기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다들 알고 있지만 19세기 말까지도 말라리아는 나쁜 공기 때문에 전파된다고 믿었다. 말라리아라는 병명 자체가 이탈리아어로 ‘나쁜’의 뜻을 가진 mal과 ‘공기’를 뜻하는 aria가 합쳐진 말이다. 잘못된 진단은 잘못된 처방을 낳는다. 19세기 말 의사들은 말라리아를 막기 위해서는 늪지에서 발생하는 나쁜 공기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온 발명품이 말라리아 병동에 차가운 공기를 주입하는 장치다. 말라리아 병동에 찬 공기를 주입해도 환자들의 예후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이 시도는 역사상 최고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에어컨이 바로 그것.

최초의 전기식 에어컨은 1902년 7월에 발명되었다. 그 이후 여름철마다 이 에어컨은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 되어버렸다. 여름을 즐기는 계절로 바꿔놓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에어컨 바람을 쐬기 위해 우리는 무수히 많은 발전소를 지어야 했고 마침내 핵발전소를 짓는 데도 거침이 없어졌다. 에어컨 가동은 전기에너지 사용과 온실가스 배출로 이어지니 결국 지구온난화를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에어컨은 쓰면 쓸수록 폭염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

그러나 우리는 핵발전소 폐기물 처리비용과 핵발전소의 잠재적인 위험에 대한 걱정보다는 당장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찬바람의 유혹에 못 이겨 에어컨을 가동시킨다. 특히 여름철이 되어 손주들이 우리 집을 방문할 때는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전기에너지 사용료와 온실가스 배출을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차원에서 에어컨을 가동시킬 때 27~28도 정도로 실내온도를 높여 맞추고 선풍기를 약하게 돌린다. 또한 거실에 설치되어 있는 에어컨을 작동시킬 때면 내 방에 설치되어 있는 에어컨은 가동치 않고 문을 열어놓은 채 선풍기만 돌린다. 이것만으로도 생활하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나처럼 면역력이 저하되어 에어컨 냉기로 인해 콧물기침감기에 걸리기 쉬운 사람에게는 이 방법이 안성맞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선풍기 겸용 방법은 어른들만 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린 손주들이 놀고 있을 때가 문제다. 마침 모처럼 만의 여름 연휴인지라 손주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방문을 열어놓으니 손주들이 들락거린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린 손주는 조심성이 없기 때문이다. 선풍기가 놀이기구다. 거실에 놓여 있는 선풍기처럼 그물망이 씌워져 있을 때는 문제가 없으나 내 방에 놓여 있는 선풍기처럼 그물망이 씌워져 있지 아니할 때는 사고가 생길 수가 있다. 어린 손주가 아무데나 손가락을 쑤셔 넣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내가 점심상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온다. 나는 다른 가족들보다 식사시간이 일러 나부터 챙겨주는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내 방으로 밥상을 들고 들어오는데 어린 손주가 선풍기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린 손주 사고 방지를 위해 밥상을 들고 있던 아내는 발로 선풍기 작동을 중지시킨다. 밥상을 내려놓고 손으로 선풍기 정지버턴을 눌러야 하는데도 말이다. 어린 손주가 이 모습을 예리하게 보고 배웠다. 이제 선풍기만 보면 발로 버턴을 누른다. 한두 번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 같이 생활하는 동안 본채, 사랑채 다니면서 선풍기만 보면 발로 작동버튼을 눌러댄다. 이를 보다 못해 내가 선풍기 앞에서 손으로 작동버턴을 누르는 시범을 보여도 이를 따라 하지 않는다. 아마 아내가 발로 작동버턴을 눌러대는 것이 인상 깊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김영승의 시 ‘반성 743’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키 작은 선풍기 그 건반 같은 하얀 스위치를/ 나는 그냥 발로 눌러 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선풍기를 발로 눌러 끄지 말자/ 공손하게 엎드려 두 손으로 끄자

선풍기를 발로 눌러 끄는 인간의 오만한 무신경을 반성하자는 뜻을 내포했으리라. 에어컨만큼은 아닐지라도 무더운 여름철 더위를 식혀주기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가장 기초적인 것들 중 하나인 선풍기. 이를 손 대신 발로 작동버튼을 눌렀다는 것. 우리의 오만 때문에 사물과 사물의 속살에 들어가지 못했다. 물건에 대해 절실하고 소중하고 감사하는 태도. 사람이 사물을 접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생의 가장 기초적인 것들에 대한 감사. 이런 감사가 있다면 우리들 각자의 삶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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