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시험
[정용우칼럼] 시험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2.10.17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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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나는 현역에서 은퇴를 하고는 이곳 시골에서 외부로부터의 큰 규제나 간섭 없이 비교적 평화롭게 살고 있는 편이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음의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들이 잔존하고 있어 가끔씩 꿈속에서 나타난다. 그 중의 하나가 시험에 대한 것인데 일종의 내 트라우마인 셈이다. 꿈속에서 대학 다닐 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취득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 오랜 병고 끝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제대 후 복학을 위한 등록을 해야 하는데 가정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아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 점, 그리고 좋은 회사 취직하기 위해서는 학점이 좋아야 하는데 복학 후 성적이 예전 같지 않은 점들이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노년에 접어든 지금도 이런 꿈을 꾸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만큼 시험은 나를 괴롭게 했다.

이처럼 시험제도는 나를 괴롭히긴 했지만 여러 가지 순기능을 고려할 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무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역기능 또한 무시할 수 없으니... 지난해의 일이지만 아직도 간혹 시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나,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사건 하나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의 배경에도 시험이라는 문제가 등장한다. 고용노동부 조사 결과, 관리팀장이 청소노동자 업무와 관련성이 없는 필기시험을 사전 공지 없이 보도록 했고, 그 시험 결과를 근무 평정에 반영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은 직장 내 괴롭힘이며, 이것이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마스크를 쓴 채 무거운 쓰레기를 들고 움직인데다 시험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기에 직접 사인인 급성심근경색으로 이어진 것일까. 고용노동부가 사망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이 필기시험이 사망의 원인 중 하나임은 분명한 듯하다.

시험이 이렇게 우리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는데도 여전히 그 시험이라는 제도의 위력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사그라들기는커녕 새 정부가 들어서고서부터 시험이라는 용어가 더욱 극성을 부리는 것 같다. 아마 새 정부 들어서면서 대두된 능력주의가 현 시대의 흐름에 맞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 같다. 엊그제 신문보도에 따르면 교육부가 윤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학업성취도 평가제도를 5년 만에 부활시킨단다. ‘학생별로 밀착 맞춤형 교육을 해서 국가가 책임지고 기초학력 안전망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나름대로 목표가 있을뿐더러 학교에서 수업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이 제도 도입에 대해 일단은 수긍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학교가 아닌 정치권에서도 이 시험제도를 시행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국회의원 등 공직후보자 기초자격평가를 하기 위해서란다. 나는 정치권에서 이 평가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우리 국민을 보다 잘 살고 행복하게 해주는 데 기여할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판단을 유보하지만 왠지 좀 민망스러울뿐더러 낯설기도 하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생각해 본다. 이 공천 기초자격 평가제도 도입보다도 우리나라 정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고 말이다.

유명한 미국 고전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라는 게 있다. 이 영화는 무더운 여름날, 판사가 뉴욕시의 법정에 아버지를 칼로 찌른 한 소년의 살인 혐의를 두고 12인 배심원들의 만장일치 합의를 통해 소년의 유무죄 여부를 가려줄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유죄일 경우, 이 소년은 사형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들에게 미리 일러두면서... 배심원 방에 모인 이들은 투표를 통해 유무죄 여부를 가리기로 한다.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전부 소년을 유죄로 판단하는 가운데, 오직 배심원 8(헨리 폰다)만이 소년이 무죄라고 주장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배심원 8이 무죄를 주장하는 시점부터 만장일치로 합의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시간이 갈수록 분위기는 무죄 쪽으로 쏠리고, 끝까지 설득당하기를 거부하던 나머지 배심원들도 반박 중에 자기모순에 빠져 결국 무죄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배심원 구성원들이 서로서로 설득과 납득을 반복하면서 무죄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진지하고도 민주적인 태도가 참 좋았다. ‘賢子以其昭昭, 使人昭昭’라 했다(맹자). ‘지혜로운 이는 그 밝은 마음의 지혜로 다른 사람을 밝게 해준다’는 뜻이다. 공천 기초자격 평가를 위한 시험보다는 이 영화 한 편 보는 것을 공천조건으로 내건다면, 그래서 정치인들이 한 단계 더 지혜로워 진다면, 우리나라 정치 품격도 한 층 더 높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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