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현수막
[정용우칼럼] 현수막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2.12.2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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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얀테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북유럽인들의 정신에 수 세기 동안 박혀 있는 일종의 행동지침이다. ‘얀테의 법칙’은 한마디로 ‘당신이 남들에 비해 특별하거나 더 우월하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사회적 규범이다. 예컨대 주말 파티 모임에서 본인이 승진하였거나, 자녀가 명문대학에 합격하였다는 등 개인적 자랑은 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는 이야기. 이것이 사회적 안정, 동일성, 하모니를 유지하고자 하는 공동체적 욕구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겸손의 법칙’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얀테의 법칙’이 아니라도 우리 옛 성현들은 겸손이 사람됨의 근본이라 가르쳐왔고 또한 스스로 실천했다. 겸손을 최고의 덕목으로 꼽으면서 “인생은 겸손을 배우는 긴 수업시간”(‘피터’의 작가 제임스 매슈 배리)으로 여겨왔다. 그리고 이 실천 덕목이 지금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대대손손 이어지기를 갈망했다. 겸손(謙遜)에서의 손(遜)은 ‘후손에 전하다’의 뜻을 함께 지녔다는 점에서도 이를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세상살이에서는 이 겸손이라는 말이 사전 속에서 잠자는 경우도 많이 접하고 있으니... 욕망과 경쟁에 불을 붙이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들은 내세우고 자랑하고 싶은 욕망을 자제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떵떵거리기를 바란다. 현수막을 활용한 자랑문화가 만연하고 있는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내가 사는 이곳 시골에서는 현수막이 많이 걸린다. 사업(특히 개업) 홍보를 위한 몇몇 현수막은 그런대로 이해할만하다. 시골인지라 현수막 외에는 별다른 홍보수단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돈을 벌어 가정경제를 유지해야 하는 이들의 절박감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들 현수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기 자랑을 위한 현수막이다. 내가 볼 일이 있어 반성이나 진주를 다녀올라치면 반성중학교와 사봉삼거리를 거쳐 가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현수막과 맞닥뜨려야 한다. 반성중학교 정문과 그 주변에 걸려있는 자랑 현수막은 그나마 내가 아량 있게 받아들여 줄 만하다. 내 고모님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80세에 가까운 내 고모가 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 우리집에서 반성중학교까지 하루 왕복 4시간을 걸어 다녔다. 집안 경제 사정이 조금 나은 사람들, 후세대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했지만... 엄청난 향학열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어려움을 견디면서 공부한 그 옛날 사람들, 그들이 출세하여 기관장이 되고 고위 공직자가 되고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기술사가 되고... 누구 말대로 개천에서 용 났다고나 할까.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들 성공을 자랑하는 현수막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힘찬 격려의 박수를 치게 만든다. 반성중학교 외에 또 한 군데 자랑 현수막이 여러 개 걸려있는 곳이 있으니 반성중학교에서 2Km 떨어져 있는 사봉삼거리다. 속칭 선거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는 정치인들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한 현수막이나 연말연시 명절 전후 인사성 현수막이 많이 걸린다. 너무 많아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다. 이들 현수막은 볼썽사납다. 정치인들의 이율배반적 형태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입만 열면 자연환경보호를 외치고 기후변화에 따르는 위험을 경고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현수막을 마구 내건다. 그야말로 ‘현수막 공해’다. 폐기되는 현수막은 땅에 묻거나 불에 태워 처리함으로써 환경오염은 물론 심각한 자원 낭비를 초래한다. 폐 현수막 처리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으면 환경부가 이들을 장바구니로 재활용하는 방안까지 발표했을까.

지도자(指導者)는 ‘길을 앞서 발견하는 사람(pathfinder)’이다. 신호와 단서를 읽고 길을 발견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곧 진정한 리더다. 이들은 그 아는 바를 드러내어 뽐내는 일이 없다. 그냥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살아갈 따름이다. 그걸 구태여 자랑스럽게 드러내어 자랑하거나 광고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향을 지녔으니 절로 향이 풍길 터/구태여 바람 앞에 서 있을 게 무엇이랴(有麝自然香/何必當風立 – 야보선사). 일부러 드러내 자랑을 한다면 그건 벌써 진위가 수상쩍은 거다. 요즘처럼 세상 물정이 밝은 시대는 특히 그러하다.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므로 굳이 과도한 자랑 표현은 필요치 않다. 과도한 자기자랑은 오히려 친구가 아니라 적을 만드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이는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될지니... 하여 나는 다음 번 선거에서 현수막 많이 내거는 후보에게는 표를 던지지 않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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