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가방끈
[정용우칼럼] 가방끈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3.02.2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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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얼마 전에 대전에 사는 딸이 카카오톡을 통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그 사진에 대한 설명도 붙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생인 손녀가 산수 공부를 못해서 학교 시험평가에서 형편없는 점수를 받고는 그 시험지를 책상 앞에 놓은 채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장면이란다.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하는 손녀가 공부를 조금 등한시한 모양이다. 나는 그 사진을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동시에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내가 딸, 아들에게 맨날 하는 말이 그대로 실현되었기 때문일까. “아이들에게 너무 공부 공부 하지 말라. 건강하고 착하게 크면 된다. 이 아이들이 사회활동을 시작하게 될 즈음이면 인구감소로 인해 집, 대학, 직장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러면 딸, 아들은 반론을 편다. “아버지 말씀도 일리는 있지만 그게 다 질(質)과 격(格)이 다르거든요.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더 이상 내 주장을 펼치지 못했다. 공부를 못해서 좋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 가방끈이 짧으면 질과 격이 다른 좋은 직장을 구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진주시 혁신도시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토지주택공사(이하 LH공사)는 세상의 보통 사람들 관점에서 볼 때 질과 격이 다른 그런 직장 중의 하나다. 특별히 공부를 잘 해야만 이 공사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LH공사에서 2021년 3월, 한 사건이 터졌다. LH공사 직원들이 3기 신도시 등 자사의 사업계획과 연관 있는 지역에 집단적으로 부동산 투기를 한 의혹이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의해 폭로되면서 관련 직원들의 전방위적인 투기 논란으로 확산되어 정치권의 핵심 이슈로 떠올랐던 적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투기형태를 비난하자 이에 맞서 한 직원이 뱉어낸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차피 한두 달만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다. 털어 봐야 차명으로 했으니 찾을 수 없다. 세상이 욕해도 나는 열심히 차명으로 투기하면서 정년까지 그리 하겠다.” 이어 그는 세상을 조롱한다. “공부 못해서 우리 공사에 못 온 것들이 꼬투리 하나 잡았다고 조리돌림하고 있는 너희들을 극도로 혐오한다.” 자신의 말과 행위에 부끄러움이라고는 없다. 오히려 당당하다. 아니 부끄러움을 부러움으로 읽는 정신승리자인 것 같다. 인간이 이럴 수도 있구나. 이 말을 곱씹어 생각하면서 참으로 답답하여 몇 날을 우울하게 보냈는지 모른다. 그 사람이 쓴 글에 ‘공부’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아니 했어도 그 우울함은 조금 덜 했으리라. 자기 말마따나 공부 많이 했다는 사람이 왜 저럴까. 참으로 어설프게 한 공부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겉모양은 번듯하나 기초가 약하여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성어가 있다. 사상누각[砂上樓閣]. 좋은 학교를 나와, 다시 말해 가방끈이 길어 요행스럽게 LH공사 직원이 되는 데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사람으로서의 ‘기본됨됨이’가 되어 있지 않기에 이것은 진정한 성공이라 할 수 없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한 성공인 셈이다.

그래서 현자들은 가방끈이 긴 것보다는 사람으로서의 기본됨됨이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누구나 아는 책이름,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로버트 풀검 지음)에서도 기본됨됨이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는 그 내용도 사실은, 유아교육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으로 단순한 기본원칙을 지켜 실천해나가는 데에 있다고 주장한다. 책을 통해 습득한 것이 아니라도 우리 부모들은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다. 학교를 나오지 않았어도, 글을 몰랐어도 상황에 맞게 처신하였으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자녀를 키우는데도 바른 인성을 심어주려고 노력하셨다. 이 모든 일들을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음에도, 가방끈이 짧았음에도 삶의 경험을 통하여 훌륭하게 처신해 오셨던 것이다.

세상에는 가방끈이 짧은 사람이 많다. 전 세계 인구를 놓고 볼 때 대학을 다닌 사람은 7%에 불과하다. 오히려 가방끈 짧은 사람들이 세상의 주류다. 주류라 하지만 가방끈이 짧아 남들 앞에 쉽게 나서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으로서의 기본됨됨이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사람도 많다. 우리 진주의 자랑, 김장하 선생도 역시 그런 분이다. 그분도 가방끈은 짧다. 중학교 졸업이 전부다(김장하 평전 ‘줬으면 그만이지’). 그만큼 가방끈이 짧은데도 불구하고 기본됨됨이를 본보였기에 우리 지역 아니 나라 전체적으로 큰 어른으로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 그분의 삶을 더듬으며, 권경인 시인이 한 표현을 떠올린다. “그가 살았으므로 그 땅은 아름다웠다.”(2023.1.19.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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