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걷기
[정용우칼럼] 걷기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3.05.08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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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어제 진주에 사는 아들 가족이 이곳 지수를 방문했다. 위 두 손녀가 하삐 집에 놀러가자고 아빠엄마에게 졸라대기도 하거니와 아들이 세 번째 손주가 이제 외출을 할 정도로 컸기에 한 번 데려오고 싶었단다. 아직 태어난 지 10개월밖에 되지 않아 자주 보지 않는 사람에겐 얼굴을 가려 겁을 먹고 울기도 한다. 그런데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친해진다. 그때부터는 사람들만 있으면 거실에서도 잘 논다. 가끔은 두 발로 서 있기도 한다. 아내는 어떨 때는 한 발짝 내디디기도 한다고 대견스러워하며 한마디 거든다. 조금만 더 세월이 흐르면 걸을 것 같다. 위 누나 둘도 돌 전에 걸어 다녔으니까 이 손자 녀석도 그럴 것 같은 기분. 첫발 떼는 날이 언제일까 기다려진다. 아기들은 직립보행을 배우면서 새로운 신체 감각을 갖고, 주변 환경을 전혀 다르게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하니 그렇게 되면 한결 높아진 시야로 세상을 드넓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어린 새들이 처음 공중을 날아오를 때 그와 비슷한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우리 사람은 걷게 됨으로써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하게 된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의 파노라마에 가슴을 활짝 열어두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물들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으며 듣지 못했던 작은 소리들이 음악처럼 울리며 세포를 깨우며 온다. 온몸의 감각이 열리고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 그 여백의 부피만큼 우리는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세대 이전의 수많은 현자들이 걷기를 삶의 기본으로 삼았는지 모르겠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매일 아침 산책을 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모임을 ‘소요학파’ 또는 ‘페리파토스학파’라고 불렀다. 소요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이란 뜻(표준국어대사전). 페리파토스는 산책길을 뜻하니 말하자면 소요학파는 ‘걷기학파’인 셈이다. 서구 근대 사상의 근원이 된 학파의 일상이 공부가 아니고 걷는 일이었다니... 걷기가 발걸음의 규칙적인 생체리듬 때문에 명상과 같은 특별한 정신상태를 만들어주기 때문일까.

마침 화창한 봄 날씨. 무조건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봄은 온전히 무료이기에, 운동화를 신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아침부터 강둑길 걷기.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연경관이 주는 위로를 챙긴다. 우리 이전부터 자리하고 있으며 아름답게 빛나던 것들이 모두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마음을 만져준다. 새소리 바람 소리가 온전히 들리고 지천인 꽃과 나무가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층층이 다채로운 초록을 마주하며 한껏 심호흡을 한다. 게다가 4월 마지막 무렵부터 피어나기 시작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내 코를 자극하기도 한다. 강둑길 아래에 늪지에 피어있는 붉은 색 아카시아는 보는 것만으로 이채롭다. 이렇게 걷는 동안 사소한 것들에 주목하면서 아름답고 이채로운 것들을 찾아 낼 수 있으니 사는 재미가 쏠쏠하다.

게다가 걷기가 건강한 노년의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덤이다. 나이 든 우리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 모두 가진 것, 바로 두 다리로 걸어 다니지 못할 때 많은 것을 잃게 된다는 사실. 걷기는 쇠퇴해가는 나의 심장과 폐를 활성화할 뿐만 아니라 나의 허리를 뱃살로부터 구원한다. 또 걷기는 나의 안구를 노트북과 휴대폰 스크린으로부터 구원하기도 하며 나의 마음을 스트레스로부터 구원하기도 한다. 이렇게 걷기는 나의 심신을 쇠락으로부터 구원한다.

어떤 사람은 한술 더 뜬다. 심신의 치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구도의 방법으로 걷기를 주목한다. “예로부터 구도자들은 사막과 숲속을 걸으며 인생의 참된 의미와 우주의 숨겨진 비밀을 찾아냈다. 좁은 나를 버리고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 그들은 길을 떠났다. 길은 내면의 소리를 경청하는 공간이었고 그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구도자들은 걷고 또 걸었다(정수복).” 요즘 거의 매일 카카오톡을 통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 고교 동창친구들로부터 사진과 글이 보내져온다. 40일 동안의 여정. 몸은 힘들겠지만 걷기를 통해 순례라는 극한의 근처까지 접근하면서 느끼는 농밀한 충일감! 걷는 것은 단순히 풍경을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만나는 것이고 침묵 속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일. 매 순간을 오로지 나로서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회! 그들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는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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