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희생
[정용우칼럼] 희생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3.05.3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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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내 산책은 주로 강둑길에서 이루어진다. 강둑길을 걸으면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도 쏠쏠한 재미 중의 하나. 24절기 중 여덟 번째 여름의 초입을 알리는 ‘소만(小滿)’이 지났으니 햇볕이 푸지고 만물이 생동해 세상에 생명들이 가득 차기 시작한다. 하여 강둑길은 온통 초록이다. 초록으로 뒤덮인 강둑길을 걸으면서 눈 아래에 자리 잡은 들판을 내려다본다. 대부분은 비닐하우스다. 그런데 그 비닐하우스 사이사이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이 보인다. 지난해 심은 가을보리가 수확기를 앞두고 누렇게 물들었다. 누렇게 물들었다는 것은 이제 보리를 수확할 때가 가까워졌다는 이야기 즉 햇보리가 나올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요즘 사람들은 굶고 사는 사람이 없으니 보리가 영양식이자 가끔 먹는 별식이지만 우리처럼 나이 든 세대 사람들에게는 햇보리는 굶어 죽을 절망에서 목숨을 이어준 귀한 작물이었다. 태산보다 높고 무섭던 보릿고개, 그 슬픈 기억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슬픈 기억을 뒤로 하고 다시 강둑길을 걷는다. 강둑길 끝머리에 다다르면 넓은 대밭이 나온다. 오래전에는 우리 소유 밭이었는데 지금은 국가 소유다. 우리 소유로 되어 있었을 때에는 일부는 대밭으로, 일부는 땅콩이나 고구마를 심는 밭으로 활용했는데 국가 소유로 되고 난 후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완전 대밭으로 변했다. 강둑길에 서서 이 대밭을 내려다본다. 이 대밭 역시 아까 본 보리밭처럼 푸르름을 잃었다. 푸르름을 잃은 것이 보리밭처럼 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초여름에서 한여름으로 치달으며 모든 잎이 초록의 빛을 더하는 때인지라 그 색의 변화가 더욱 뚜렷이 느껴진다. 새 생명인 죽순에 영양분을 내주느라 이 무렵 대나무는 누런빛을 띠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살피지 않고 자식들을 돌보는 데 모든 것을 내놓으시는 우리 부모님을 닮았다. 먼저 우리는 임산부의 얼굴을 떠올린다. 누렇게 뜬 얼굴. 새 생명을 잉태했을 때 배 속의 아기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느라 그랬다. 자식들을 키울 때도 우리 어머니의 얼굴색도 대밭처럼 누런색이었으니... 특히 요즘 같은 보릿고개 시절, 우리 어머니들 얼굴색은 더욱 그랬다. 보릿고개 시절이 아니라도 가난한 살림에 늘 가족의 끼니를 염려하시어야 했던 우리 어머니들의 밥상은 늘 그랬으리라. 식구들이 남긴 국을 마저 드시고 몇 오라기 나물과 마지막 김치조각까지 차례로 비운 후, 허기진 식사를 달게 마치셨다(우남정, 어머니의 밥상). 자신은 못 드셔도 오로지 자식이 먼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자기 인생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선물이라고 여기며 키웠다. 희생의 무게를 뛰어넘는 즐거움이요 행복 그 자체였다. 출산과 양육만 그런 것이 아니다. 희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은 사례는 수없이 많다. 독재에 저항하다가 감옥에서 아까운 청춘을 바친 사람은 ‘민주화 유공자’가 되고, 아들딸을 세계적인 음악가나 운동선수로 키우기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한 어머니는 ‘장한 어머니’가, 성탄절 즈음에 나타나 구세군 냄비에 보통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돈을 투척하고 사라지는 익명의 독지가는 ‘기부 천사’가, 자살 폭탄 테러에 자신의 생명을 바친 무슬림은 ‘순교자’가 되었다. 이들은 자기희생을 통해 보통 사람은 얻지 못한 의미를 획득함으로써 행복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까지 받았다.

그런데 이젠 희생을 하고 의미를 얻는 삶이 즐거움을 더 가져다준다고 믿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만 소중한 세상이 되었다. 사회적 연대감이 강하게 흐르는 사회가 아니라 각자도생의 세상이다. 미래의 생명력과 희망을 잃은 사람들,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 이렇게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질만능주의의 미망에 사로잡혀 정신적인 휴면상태에 빠져있다. 허무덩어리다. 그럼에도 희생의 가치를 믿고 따르는 사람도 여전히 많다. 옛 소련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영상의 시인’, ‘영화계의 순교자’ 등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그가 생에 마지막 작품으로 ‘희생’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죽은 나무와 수도사에 관한 전설이 영화의 토대다. 수도사는 의심도 타산도 없이 희망을 품고 자신의 일에 헌신했다. 그것은 죽은 나무까지도 되살리는 끈질긴 희망, 희망에 대한 희망, 오로지 굳건한 믿음만이 가져다주는 희망을 품고서 한 희생이다. 강둑길 반환점을 돌면서 그가 한 말을 생각해 본다. “어느 날 일어나 보니 나뭇가지가 어린잎들로 뒤덮여 있다. 이것이 과연 기적일까? 이것은 진실이기도 하다.” 그에게 희생이란 곧 희망을 의미했고 그런 희망만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새로운 죽순을 탄생시키기 위해 누렇게 변한 대밭, 우리네 어머니를 닮은 대밭을 바라보며 희생은 곧 희망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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