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낫과 숫돌
[정용우칼럼] 낫과 숫돌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3.06.12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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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5월에는 어버이날이 있었고 6월에는 현충일이 들어 있다. 마침 공교롭게도 올해 우리 조상님들 기제사날(코로나 창궐 이후부터 조부모님과 부모님 기일제사를 매년 제일 먼저 도래하는 어머니 기일제사일에 함께 봉행)이 현충일이었다. 조상님들 기일제사는 음력을 기준으로 모시는데 올해는 현충일과 겹친 것이다. 제사는 집에서 모시지만 내가 은퇴한 후 이곳 고향에서 지내고부터는 매년 기일제사에 앞서 묘소 벌초를 한다. 조상님들께 공경과 감사의 인사를 미리 드리는 셈이다.

물론 요사이 벌초는 대개가 예초기로 한다. 낫에 비해 작업능률이 아주 좋아 단번에 작업을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낫은 예초기 만큼 일의 효율은 올리지 못하지만 낫을 사용함으로써 그 나름대로 얻게 되는 이점도 있다. 예초기는 기계이기 때문에 그 소리가 요란하지만 낫질은 조용해서 좋다. 게다가 내 마음에 따라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에 작업 시 내가 주인이 된다. 하여 베어진 풀에서 나오는 향긋한 풀냄내도 맡을 수 있고, 가끔씩 콧노래를 불러가며 여유를 즐길 수도 있다. 또한 주변이 평화롭기에 조상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기쁨도 만끽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남의 집 일이 아니라 자기 집 일이라면 그리고 그 일이 일정에 쫓기는 일이 아니라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예초기보다는 낫을 사용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낫으로 풀을 베어내려고 하면 얼마 사용하지 않아 날이 무디어진다. 특히 묘소 주변의 굵은 찔레 나뭇가지나 칡넝쿨 따위를 낫으로 베어낼 때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내 시골의 일상생활이 낫을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어 - 집 주변의 풀은 아들이 사다준 충전용 밧데리를 끼우는 예초기를 활용하여 간단히 제거 - 올해 벌초 후 내년에야 이를 다시 찾게 되다보니 오랜 시간 방치해둔 상태. 하여 낫날이 녹슬어버린다. 녹이 슬면 잘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낫을 갈아 써야 하는 데 낫 가는 기술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몇 차례나 새로 낫을 사서 그 해 그 해 벌초를 했다. 몇 번을 새로 샀는지 모른다. 우리 집 창고에는 한 해 쓰고 버리다시피 한 낫이 여러 개 있다. 이 또한 낭비다 싶어 나도 낫 가는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있던 차에 어느 날인가 반성 5일장이 설 때 생선 파는 가게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마침 주인아저씨가 칼을 갈고 있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그 아저씨에게 칼 가는 기술 좀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상세하게 설명해주시고 특별히 시연도 해주셨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도 올해부터는 우리 집에 녹슨 채 보관되어 있는 낫을 갈아서 사용해보자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치야 날을 세우는 것이니 앞면 뒷면을 번갈아 갈면 되지 않겠나 하고 생각하면서 낫 가는 작업에 돌입한다. 반성 5일장 생선 파는 아저씨가 가르쳐준 대로 숫돌과 각을 세워 낫을 갈아 나간다.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숫돌에 바르고 낫에도 물을 묻힌다. 한 손으로 낫의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날의 끄트머리를 잡는다. 쓱싹 쓱싹 낫 가는 소리가 제법 경쾌하다. 계속 쓱싹 쓱싹 문질러댔더니 제법 날이 빛난다. 두텁게 내리 앉은 녹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투철한 삶의 질서를 지니지 못해 녹슬어 가던 나의 추한 모습을 확 바꾸어낸 듯. 기분이 상쾌하고 만족스럽다.

과연 낫을 간 보람이 있었다. 내가 간 낫을 사용한 최초의 벌초! 풀이 잘 잘린다. 풀 잘리는 소리도 서걱서걱 가볍고 경쾌하다. 이렇게 하여 새 낫을 산 때와 같이 별로 힘들지 않고도 작업을 끝마칠 수 있었을뿐더러 이번 일을 계기로 나는 낫 가는데 자신감이 생겼다. 하여 창고에 처박혀 있는 녹슨 낫들을 다 끄집어낸다. 다음 벌초 때 사용하기 위해 미리 갈아놓기 위해서다. 갈아서 쓸 만한 게 모두 7개다. 그중 한 개를 집어 들고 낫 가는 작업에 돌입하려는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한 생각!

낫을 갈려면 함께 비비댈 숫돌이라는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날이 더 빛날수록 숫돌도 그만큼 더 많이 깎이어 간다는 사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좀 빛나기 위해서는 상대는 깎이고 문질러져야 된다는 사실. 그 상대는 현충일에 기일제사를 모신 우리 조부모님, 부모님일 수도 있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전몰장병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 혼자 잘 나서 이렇게 까불대며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들의 희생으로, 그들의 망가짐 덕분에 오늘 내가 이만큼 까불대며 살아간다는 사실. 낫과 숫돌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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