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희의 세상엿보기] 개천변의 인문학(人文學)
[김용희의 세상엿보기] 개천변의 인문학(人文學)
  • 김용희 시인·수필가
  • 승인 2023.06.14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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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희 시인·수필가
김용희 시인·수필가

1. 인간은 왜 고통스럽고 외로운가?

1) 고통의 내용들에 대하여.

인간관계 고통,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고통, 좋은 사람과 같이 있지 못하는 고통, 싫은 인간과 같이 있어야 하는 고통, 경제적으로 힘든, 남보다 뒤처지는, 거들먹대는 인간, 잘난 체하는 인간을 인내해야 하는 고통 그리고 가정폭력, 데이트 폭력... 나는 부족하고 뒤처지는데 남들은 잘 되는 것을 봐야 하는, 그리고 또 타인의 노예로도 살아야 하고, 자존심도 버려야 하고, 가고 싶은 곳 못 가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늘 통장잔고에 시달리고, 사랑하는 부모를 먼저 보내야 하고, 좋은 것은 다시 빼앗길까봐 두려운.... 그리고 정치인들의 국가경영에 대한 불만까지. 이런 수많은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이유는? 끝없는 고통. 사실 그 고통이 없으면 나태와 무료함과 무의미로 다시 고통스럽다.

2) 외로움의 현상들에 대하여.

남들은 다들 즐겁게 사는 것 같은데, 난 왜 외로울까? 바쁘게 살다가도 가끔은 외롭고, 배우자가 잘해주는 데도 문득 문득 외롭고... 또 배우자가 없으면 더 외롭고, 여친 남친이 있어도 불만스러운 것들이 너무 많고, 다들 재미있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늘 나만 이럴까? 한밤중 잠 깨어 바라본 하늘에서 왜 더 짙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일까? 어릴 적 꿈꾸던 미지의 행복은 오지도 않았고 친구는 떠나고... 왜일까? 수시로 외롭고 무료하고 지겹기도 한 이유는? 퇴근길 창공에 뜬 달이 허허롭고 강변을 나는 물오리의 날갯짓을 보면서도 난 왜 외로워할까? 산비둘기도 짝을 이뤄 먹이활동을 하는데...

2. 그 원인을 살펴보자. 위 문제에 전혀 해당없는 분은 제외하고.

1)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식으로는 생노병사 때문이다. 사람은 원래 그 삶이 유한하고 또 하자와 흠이 있는 한계적 인간이기에 그렇단다(諸行無常). 비록 지금이 행복하다고 해도 그 행복은 언젠가 끝이 나기에 본질적으로 인간에게는 불행과 고통이 동반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삶은 그래서 고해(苦海)다. 그것은 아마도 욕망을 무한한데 충족시켜줄 대상은 제한적이고 유한하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인간에게는 시간도 공간도 재화도 유한(有限)한데 욕망은 무한(無限)하니 어쩔 수 없이 고통은 태생적으로 예정되어 있다. 그렇다고 무한대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인간은 더더욱 쉽게 타락한다. 김정은의 얼굴을 보라. 솔로몬의 삶을 보라. 다윗의 삶도 마찬가지. 주지육림이란 이런 삶의 욕망을 채워가는 유형에 해당되는 단어다. 인간은 그 자체가 만들어진 피조물이며 유한하고 한계적 객체일 뿐이다, 그런데 주체가 되려고 하는 욕망을 가지고 절제 제어하는 기재가 원래 없기 때문이다. 한계적 실존적 개체가 무한계의 욕망을 지지니 고통은 동반될 수밖에 없다.

2) 외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르트르의 분석대로 인간은 대자존재(對子存在 for it self)이기 때문이요, 우주의 음양법칙 때문이다. 나무나 풀 혹은 가축들은 즉자존재(卽子存在)다. 즉자존재는 그냥 존재하지만 사람은 생각하면서 대상을 반영하면서 존재한다. 즉 거울과 같고 빈 그릇과 같다. 늘 무엇인가 대상을 비추어야 하고 무엇인가로 채워야 한다. 빈 그릇은 무엇인가를 담지 않은 상태라면 늘 공허하다. 존재론적 공허다. 사람은 상대방이든 자연이든 정치적 견해든 라디오의 음악이든 처리해야 할 업무든 무엇이든 그 대상으로 채워야 한다. 그리고 그 대상들에 또 반응한다. 삼매(三昧)나 몰아(沒我) 무아(無我)에 빠져 의식하지 않고 존재하기가 어렵다. 조성민이 피아노를 칠 때 궁사(弓師)들이 활시위를 당길 때 무아지경이 되면 최고의 찬사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인간은 나무나 풀 염소같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본태적으로 외롭다.

그리고 인간도 음양 우주의 질서에서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음과 양은 서로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완벽한 음과 양은 없다. 음 속에는 양을 포함하고 동지(冬至)에도 하지(夏至)가 들어있다. 그렇게 ‘관계로 존재’하기에 완전히 ‘독립된 개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관계는 서로 협력하고 양보하는 물리적 관계가 아니라 원래 존재론으로 서로 관계되어있다는 의미다. 이것이 마르셀의 가족관계에 대한 설명에서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으며 사막에서는 외로워 자기의 발자국을 보기 위해서라도 뒤로 걷는다는 것이다. 동물들도 구애(求愛)를 위해 인간보다도 더 처절하게 노력하며 연적과의 투쟁을 위해서는 목숨을 건다. 그게 생태들의 본능이다. 음양관계는 본능이기에 거부할 수 없다. 여기에 존재론적 고독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관계는 데카르트 식과 공자 식의 물리적 관계가 아니라 불교의 인연설이나 성리학의 음양관계와 같이 본래적이라 떼어 놓을 수 없다. 때문에 외로움은 그렇게 본래적으로 화학적으로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어 외로운 것이다.

3. 그렇다면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1)불교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을 깨닫는 것이다, 제행은 무상하다는 것을(諸行無常),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모든 것은 늘 변화하는 과정 중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제법(諸法)에 나는 없다는 것을, 현재의 나가 아닌 ‘아트만(atman,眞我)’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 나는 원래 없고 관계만 있는데, 나라는 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고통이 발생한단다. 그런데 내가 없으면 화내고 느끼고 먹고 잠자고 일하는 나는 누구인가? 그게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했다고 해서 그렇다고 고통이 사라졌나? 허무맹랑한 관념놀이 백해무익한 허황된 얘기 아닌가? 고집과 집착을 멸하고 도(道)로 나아가라.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고 허망하니 끓어오르는 집착을 버리고 열반(涅槃)의 상태가 되라. 세상은 모두 고통이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 얘기냐는 거지? 욕망은 DNA에 이미 포함되어서 인간은 제작되었는데 부레없는 물고기를 본 적이 있는가? 열반(涅槃)송? 오도송(悟道頌)? 고승들의 그런 스토리가 착각이나 거짓일까? 혹은 아니면 실체적? 진실일까? 욕망이 제거된 삶이 그렇게 가능할까? 스피노자나 라깡은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서양은 긍정하고 그 위에 자본주의 집을 지었는데... 그런데 사실 늙어서도 욕망에 포로된 삶은 슬프다. 재벌들이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집착과 욕망. 끝내 경영권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음양의 욕망에도 포로되어 있는 그들을 보면 그건 사실 슬프다. 욕망이 제거된 삶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불가능한 것도 아닐 것같아 보인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앞에선 꽃 같은” 삶이, 애욕을 끊고 열매맺어가는 삶이 그렇게 완벽하지는 않지만 끝없이 그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기만 한 것은 아닌 것같아 보인다. 그러지 못하고 늙어서도 끝없이 욕망에 시달리고 끄달리는 삶은 어쩌면 슬프고 추해 보인다.

2) 성리학 식이라면

어떤 해법이 제시되는가? 공자식은 해법이 아닌 듯 보인다. 공자 자신이 그 한계를 넘지 못하고 슬프게 세상을 하직했다. 자식과 애제자 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일주일만에 삶을 마감했다. 성리학과 주역 식이라면? 화담의 기(氣)철학은 이미 무아의 경지에 간 것같아 보인다. 생사는 다만 기(氣)가 흩어지고 모이는 것의 현상일 뿐이라는 기(氣)론의 화담. 그리고 퇴계도 마찬가지다. 퇴계를 이기론(理氣論)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그도 세상이치를 수용한 것 같다. 삶의 본질을 이미 꿰뚫은 것 같다. 우주의 운행원리를 알고 체득하고 순응하는 경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욕망에 있는 그대로 포로 되지도 않는다. 잘 늙는다는 것은 이런 것 아닐까? 욕망으로부터 해방된 삶. 부단히 그렇게 나아가는 것.

3) 기독교 식이라면

잘못 간 기독교인은 하나님도 내편으로 만들어 끝까지 나의 욕망을 완성하는 도구로 사용할 뿐이다. 택함 받은 특권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며 믿었다는 이유로 천국까지 예약했다는 유의(有意)의 세계, 이것도 이렇게 되면 주고받는 이익과 거래의 이기적 관계이기는 마찬가지다. 욕망에 욕망을 더하는 삶이다. 아마도 하나님도 어찌해 볼 수 없는 구제불능의 삶이겠다. 그러나 대부분 이쪽이다. 그래서 개신교가 세상 종교 중에서는 무신론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종교가 되었다. 욕심을 흩어내라 했더니 쌓으려 간 사람들. 그게 다수의 개신교 교회 신자들인 것이다. 이건 이기적 집단놀이에 불과하다. 사실 교리 자체가 그런 점이 많다.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용서해주는 교리. 특별히 선택해서 죄 사하고 구원하는 특혜의 종교, 그래서 그게 인간이 만든 것 아니냐 하는 거지.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사랑의 하나님인데. 자기를 버리는 것을 가르쳤지 자기를 더욱 껍질로 꽁꽁 싸매는 것을 가르치지는 않았는데, 그렇다면 본인은 택함을 입은 백성이라는 특권의식은 자만과 오만의 구제불능의 표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내가 죽고 내 안에 하나님이 사시는 것’이라는데. 내가 죽는 것은 불교식의 그 자아가 죽는 것이다. 이기적 욕망의 자아말이지. 욕망에 욕망을 더하는 이기적 자아를 버리고 그 통 자체를 비우고 거기에 하나님을 채워넣는 것, 내가 비었다는 것은 불교식으로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다. 나의 이기적 욕망을 주 안에서 내려놓는 것이 거듭남의 시작이다. 주 하나님이여 주권대로 하시옵소서, 원래 내 것을 없나이다... 무아의 경지다.

4. 공통분모 하나 있다.

나는 없다는 것, 존재는 모두 이(理)와 기(氣)의 상호 관계 속에 관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원래 무아(無我)라는 것, 내가 죽고 내안에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 지금의 나 희오애락애오욕은 사실 실체가 아니다. 이건 거짓이다. 현재의 자아는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안개같은 것이다. 불교도 성리학도 기독교도 이것을 말하고 있겠다. “너희는 안개니라. 그 허망한 것에 집착하지 말고 나를 본받으라. 그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러면 억지스러워도 유(儒)/불(佛)/기(基)가 같이 합해지는 것이 아닌가? 다원론은 악마의 꼬드김이다? 다원론은 없다 오직 하나님... 그것은 이미 욕망의 시작이라는 거지.“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사람들이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누17: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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