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화병에 꽂힌 글라디올러스 꽃을 보며
[정용우칼럼] 화병에 꽂힌 글라디올러스 꽃을 보며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3.07.2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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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마다 고유의 아름다운 구석이 있기에 그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연경관이 주는 위로를 챙긴다. 지금은 여름. 녹음방초(綠陰芳草)의 계절에 걸맞게 모든 자연 생물의 성장과 푸르름이 극치를 이루는 계절. 그러기에 꽃도 제일 많이 피고 진다. 우리 집 화단에서 피어난 모든 꽃은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단번에 내 마음을 사로잡지만 그 중에서도 글라디올러스는 단연 압권이다. 그런데 이 글라디올러스에 문제가 생겼다.

우리 집 화단의 글라디올러스는 몇 년 전 아내가 서울 모 백화점에서 구근을 사와서 심어 놓은 것이다. 날렵하게 뻗은 잎이 무사의 검을 닮았다(‘글레디에이터(gladiator’라는 영화는 ‘검투사’를 뜻하는데 어원이 라틴어의 ‘검(gladius)’에서 왔다고 한다. 글라디올러스도 같은 어원을 가져 있다). 칼날 같은 잎이 커지면서 꽃대가 형성되고 이 꽃대 앙 옆으로 꽃봉오리가 생겨난다. 이 꽃봉오리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래서부터 위쪽으로 향하면서 하나 둘 씩 강열한 색감의 꽃을 피워낸다. 꽃이 여러 개 피어나면 도도하게 길쭉하기만 한 꽃대가 과연 꽃들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꽃이 끝까지 피기도 전에 비바람이라도 불어 닥치면 필시 쓰러지고 말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원예전문가들은 잎이 커져 꽃대가 형성되면 지지대를 설치해 준다고 했는데 원예 지식과 경험이 일천한 나는 꽃을 즐기기만 할 뿐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던 중 장마가 들이닥쳤다. 올해 장마는 유난히도 거센 비바람을 몰고 다녔다. 꽃이 피어나기 시작할 때 내가 어렴풋이 염려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비바람에 꽃대가 꺾이고 만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부러진 꽃대를 그냥 두거나 아니면 잘라서 버렸을 텐데 올해는 달랐다. 올해 초부터 이곳 시골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한 아내가 이 모습을 보더니 꺾어진 꽃대를 잘라 화병에 꽂는다. 그리고는 거실 창가 탁상 위에 갖다 놓았다. 꽃대가 6개나 되었다. 각 꽃대마다 15개 정도의 꽃봉오리가 달려있다. 그중 5개는 꽃이 핀 상태. 앞으로 10개 정도의 꽃이 더 피어날 것이라고 아내는 이야기한다. 나는 기대 반 의심 반 심정으로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내 말대로 꽃이 하나 둘 씩 피어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글라디오러스라는 꽃이 대부분 절화용(折花用)으로 사용되는 줄 몰랐다.

아내 덕분에 화병에 꽂힌 채 피어나고 지기를 계속하는 글라디올러스 꽃은 내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햇빛 잘 드는 창가에 두고 일주일에 물 한 번 갈아 주었을 뿐인데도 예쁜 꽃이라는 과분한 선물을 선사한다. 하루에도 몇 차례 유심히 관찰한다. 유심히 관찰한다는 것은 천천히 본다는 뜻. 천천히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본다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음미한다는 것이다. 그날이 그날 같아도 놀랍게도 똑같은 하루는 단 하나도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모든 꽃이 잠시도 머물지 않고 변하고 있다. 그런 변화가 있을 때마다 내가 느끼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답답함이 풀리고 희망이 생겨나고 감성을 회복되는 듯했다. 이렇게 나의 유심한 관찰은 10여 일 계속된다. 과연 시간이라는 심판자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도 어제의 모습 그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시간은 야속하지만 어김없다. 글라디올러스 꽃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심판자는 모든 것을 매 순간 변화시켜 결국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게 만든다. 시간은 ‘있음’을 ‘없음’으로 조용히 변신시키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다. 10여 일이 지나자 꽃은 완전히 시들어버렸고 이를 본 아내는 꽃대를 폐기처분해 버렸다.

나는 더 이상 글라디올러스 꽃을 맞이할 수 없다. 하지만 이 꽃이 다시 살아나 자기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는 듯하다. 비바람에 꺾여 죽을 줄 알았던 꽃이 햇빛과 물만의 힘으로도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나날이 ‘날로 새로워지고, 날이면 날마다 새로워지며, 또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_大學’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런데도 우리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느 땐 자신의 성을 쌓고 그곳에 안주하고 싶어 한다. 변화가 주는 고통이 싫기 때문이다. 변화가 두려워 자기 성을 쌓고 문을 굳게 닫고 있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생각도 바뀌고 몸짓도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여의치 않은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완벽하게 꽃 피운 글라디올러스처럼 온전한 사람이 되어 죽음에 이르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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