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잊지 못할 선물, 맥주 한 병
[정용우칼럼] 잊지 못할 선물, 맥주 한 병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3.08.2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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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버부리아줌마. ‘버부리’는 이곳 말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 말을 하지 못하니 곧 듣지 못하는 사람, 즉 청각장애인인데, 내 일가친척 중 한 분이다. 내 할아버지와 그분 아버지가 사촌간이니 제법 가까운 친척이라 할 수 있다. 할아버지와 같은 날 태어났는데, 태어난 시간이 빨라 그분이 할아버지 형이다. 일찍이 일본 유학 가서 그 당시 토목기사가 되었다. 그 당시는 이런 자격증을 획득한 사람이 흔치 않았기에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지만, 그만 병(결핵)으로 일찍 돌아가시면서 식구들은 생활고를 겪어야만 했고 더욱 정상인이 아닌 버부리아줌마로선 결혼은 엄두도 못 낼 지경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신부가 청각장애인이더라도 소위 ‘양반’일 경우, 신분 상승을 위해 장가오려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 밤 합방을 하는 데, 신랑이 옷고름을 벗기는 순간, 말 못하는 이 신부가 기겁을 하는 바람에 신랑은 놀라서 결혼이고 뭐고 포기해버린 채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평생 동정으로 지냈다. 위로 차원인지 놀림 차원인지는 모르겠지만 동네사람들은 ‘이서방네’라고 불러주고 있다. 아마 그 달아난 신랑의 성씨가 이 씨였던 모양이다.

이 ‘이서방네아줌마’는 어머니와 함께 우리 집과 바로 경계를 접하여 살고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사촌 형 죽고 나서 평생동안 남은 가족들을 잘 돌봐주셨고, 어머니께서도 할아버지 사후에 줄곧 그렇게 하셨고,.. 나도 그럴 운명에 놓였다. 어느 날인가, 아마 내가 국회의원 보좌관직을 수행하면서 이곳 지수에 들러 대청마루에 앉아 쉬고 있을 때의 일로 기억된다. ‘이서방네아줌마’의 어머니(굼실할머니)께서 나를 찾아왔다. 이 굼실할머니는 그 당시 90세 가까이 되어서 허리가 완전히 굽어 –90도 정도– 잘 걷지도 못할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지팡이에 의존하여 그 무거운 맥주 한 병을 들고 오신 것이었다. 내가 굼실할머니께 이 무거운 맥주를 어찌하여 들고 오셨는지 여쭈었다. 평소 맥주를 좋아하는 나에게 줄 선물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어렵게 가져오신 맥주 한 병의 선물! 선물을 받으면서 웬 선물이냐고 여쭈었더니 부탁 하나 하련다고 하셨다. 뭐냐고 말씀해보시라고 했더니, 자기 죽거든 이 말 못하는 딸 좀 돌봐달라는 것이었다. 우리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랬듯이... 나는 확실하게, 속 시원하게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선물을 받지 아니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도와주고 보살펴주기는 했을 것이다. 일가친척일 뿐만 아니라, 약간의 타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 자신도 아주 무심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확답을 해 줄 수 있는 입장은 못 되었다. 그 당시 국회의원 보좌관으로서의 내 삶의 방향이 유동적인 것이 그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적당하게, 두리뭉실하게 대답해드렸다. 가능한 한 그리하겠다고... 굼실할머니는 나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주신 후 1년 정도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굼실할머니 사후 우리 가족이 이런저런 면에서 이서방네아주머니의 도우미 역할을 한 것은 집을 맞대어 살고있는 사람들끼리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일 지도 모른다. 툭 하면 우리 집에 찾아오신다. 밤낮이 따로 없다. 그래도 아내는 그다지 귀찮아하지 않았다. 이곳 지수에서 7년 반 동안 어머니 병수발하면서 어머니보다 한 살 아래인 이서방네아줌마 보호자 역할도 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이서방네아줌마는 드디어 국가에서 보살펴주는 행운을 맞게 된다. 국가에서 생활비, 병원비, 집수리비용까지 모두 대어주게 되었다. 그리고 복지사가 수시 방문해서 기초적인 반찬을 갖다 주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저런 생활 상황도 체크해 갔다. 이젠 우리의 보살핌이 없어도 혼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 사후, 아내는 근심걱정 없이 내가 살고있는 서울로 이사할 수 있게 되었고. 나는 굼실할머니와의 약속 부담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맥주 한 병 사거나 마실 때면 굼실할머니가 나에게 갖다주신 이 선물이 생각나곤 한다. 아주 조그만 선물이었지만 그 선물의 기억은 아직도 선연하다. 누군가는 말했다. 우리가 주고받는 선물이 진정한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목적성이 없어야 한다고.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까? 살아가다 보면 어찌 목적성 없는 선물만 주고받을 수 있을까? 때에 따라서는, 상황에 따라서는 목적성 있는 선물이 더 고맙고 아름답게 여겨질 때도 있을 것이다. 장애인을 딸로 둔 어머니의 그 목적성이라는 것은 위대한 모성의 발로이니 하늘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거늘... 며칠 전, 이서방네아주머니가 3년간의 요양원 생활을 끝내고 93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아주머니의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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