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허공
[정용우칼럼] 허공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3.09.2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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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내 몸 컨디션이 좋은 날은 강둑길 산책을 하루에 두 번 한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첫 번째 산책은 새벽에 한다. 산책에 나서기 전 이곳 날씨 정보를 챙겨보았을 때는 분명 ‘맑음’이었는데, 문밖을 나서서 하늘을 보니 온통 암흑 그 자체였다. 비가 내리려나 하고 의심하면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스마트폰을 켜 본다. 분명 ‘맑음’이었다. 하여 어둠 속에서 집을 나선다. 2차선 도로를 약 15분 정도 걸어가면 강둑길에 진입하게 된다. 하늘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더니 강둑길에 진입하고서부터는 사물이 식별될 정도로 밝아졌다.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했다. 그 순간 알아챈다. 아까 그렇게 하늘이 온통 암흑 그 자체였던 것에 대해. 구름이 약간이라도 떠 있었더라면 명암이 느껴졌을 텐데 구름 한 점 없었으니 하늘 전체가 온통 검게 보였던 것이다. 강둑길을 조금 더 걸어갔더니 하늘이 더욱 높고 맑게 변해갔다. 전형적인 가을 하늘이다. 하늘을 보는 순간 감격스럽고 벅찬 감정이 되어 ‘허공(虛空)’을 생각한다. 하늘이 아니라 허공이다. 허공, 허공, 허공...

새들이 아침을 맞아 강둑 주변에서 노래 부르며 힘차게 비상한다. 허공이 아니라면, 만약 어떤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다면 새들은 저렇게 자유롭게 날 수 없을 것이다. 허공이 안아주고 받아들여 주었기에 저렇게 멋지게 노래 부르며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더 걸어간다. 아침 일찍 농부들이 쓰레기를 태우나 보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연기가 공중으로 솟아올라 사라질 수 있는 것도 허공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허공이 안아주고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면 연기는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을 터. 조금 더 걸어 강둑길 반환점에 도달한다. 물펌프장 주변 가로등에 불이 켜져 있다. 그 불빛을 나는 바라본다. 그것도 허공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허공이 그 불빛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허공이 없다면 나는 그 불빛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강둑길 양옆으로는 구절초가 군데군데 피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고 또 다른 꽃에서는 억새풀들이 하얀 털을 나부끼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역시 허공 덕분이다. 삼봉부락(세 봉우리가 마을을 이룬다 하여 이 지방 사람들은 이 부락을 ‘삼봉’부락이라 부른다) 맨 끝 봉우리에 우뚝 솟아 있는 키 큰 느티나무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그 나무 뒤에 말없이 배경이 되어주고 있는 허공 때문이다. 허공이 없다면 그 느티나무도 저렇게 아름답게 보일 리 없다.

반환점을 돌아 계속 강둑길을 걷는다. 벼가 알차게 익어가고 마가 줄기를 말린 채 그 뿌리를 튼튼히 키워 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햇빛의 힘으로, 바람의 힘으로, 땅의 힘으로 알차게 영글어 가고 있는 것이다. 허공이 햇빛을 전달해 주고 바람을 불게 해주고 땅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기에 가능하다. 이 모두가 허공 덕분이다. 그러다가 강둑길을 걷고 있는 나에게까지 생각이 미친다. 내가 이렇게 숨 쉬며 살아 있는 것도 다 허공 덕분이다. 허공이 없다면 나는 하루도 아니 한순간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때 아닌데도 무척이나 예쁘게 피어난 장미꽃이 나를 반긴다. 저 꽃을 있게 한 것도 허공이요, 허공이 있어 꽃 뒤편에 여백을 만들어냄으로써 꽃이 더 아름답게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유영모 선생은 염화미소(拈華微笑)를 바르게 깨달으려면 꽃만이 아니라 꽃 밖의 허공을 보라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허공은 하는 일이 많다. 아무도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해준다. 텅 비어 자유자재하면서도 만물을 안아주고 베풀어주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허공은 자유이며 생명이다. 허공처럼 살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와 생명의 가치를 일깨워준 성인 현자들이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수도승 흉내 내기’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나도 그들 성인 현자처럼 허공을 닮은 삶을 살고 싶다. 텅 비어 있어 아무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아니 하는 일 없는 허공처럼 살고 싶다. 허공이 그러하듯 내가 관심 갖고 지켜보는 모든 사람,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생명의 가치를 느끼며 살 수 있도록 기도해 주고 도와주고 싶다. 그리하여 내가 만나는 모든 것이 그 처한 처소에서 존재의 가치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무척이나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 ‘허공이야말로 참’(유영모)이라. 자신을 허공처럼 비워내지 않고는 다른 사람 하나라도 건져낼 수 없다는 말씀이려니... 이 말씀을 가슴에 안고 오늘 하루를 시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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