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시래기
[정용우칼럼] 시래기
  •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 승인 2023.12.2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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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정용우 前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부 학부장

오늘 점심은 시래국과 함께 한다. 된장만 넣어 끓였다는 데 그 맛이 일품이다. 구수한 맛과 부드러운 촉감이 특이하다. 겨울철 내내 우리 집 좋은 먹거리 중 하나가 될 터. 우리 집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무는 대중적인 채소고 그 부산물인 시래기도 어느 집에나 있을 정도로 흔하다. 그래서 내다 판다고 해도 누구 하나 사갈 사람이 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남이 장에 간다니 시래기 지고 나선다(남이 뭔가를 하면 그저 덩달아 따라 하기만 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 쓴다)‘는 속담이 생겼을 정도이다. 그 만큼 흔했다는 이야기.

이처럼 흔한 만큼, 시래기는 우리네 가난했던 시절의 겨울철 주요 먹거리가 되었다. 나물이나 시래기국 같은 국거리 재료로 사용되며, 시래기무밥, 시래기나물 등 다양한 음식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게다가 무청은 태생 자체가 흔해 빠진 폐기물의 재활용이므로 돈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된다. 수거하는 데 필요한 약간의 노동만 제공하면 끝이다. 무에서 잘라낸 무청을 창고나 헛간 또는 처마 밑에 노끈을 걸어 매달아놓고 말리기만 하면 시래기가 된다.

이렇게 무청을 말려 시래기로 만드는 작업은 은퇴 후 시골살이를 시작하면서 매년 겨울철이 다가오면 치르는 연례행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올해도 남강 건너편에 큰 농장을 갖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친구는 겨울철 수익원으로 단무지 재료가 될 무를 계약 재배한다. 무가 다 자라면 단무지 회사는 무만 수거해 가고 무청은 그냥 밭에 버린다. 며칠 있으면 다음 농사를 짓기 위해 밭을 갈아엎게 되는데 그 전에 무 농사를 짓지 않는 친구 몇몇에게 무청을 수거해가라는 전갈을 보내온다. 나를 비롯해 친구 몇몇은 이 농장에 출동하여 버려진 무청 중 쓸 만한 것만 골라내서 각자 집으로 갖고 온다. 말하자면 무는 주산물로서 단무지 회사에서 수거해 가고 우리는 부산물(또는 폐기물)인 무청을 수거해 말려서 겨울철 좋은 식재료로써 활용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인 경우도 있다. 강원 양구군 해안면에 가면 그릇 모양으로 생겨 ‘펀치볼’로 부르는 지형이 있다. 여기에 사는 농가는 무청을 잘 말려 시래기로 만든 후 전국에 판매한다. 이곳에서 생산한 시래기가 식재료로써 좋은 평가를 받다보니 유명 상품이 되어 전국적으로 팔려나가는 모양이다. 요즘 들어 시래기가 건강식품 중 하나로 자리잡아가는 듯하다. 겨울철에 모자라기 쉬운 비타민과 미네랄 식이섬유소가 골고루 들어가 있어 건강에 좋은 시래기, 겨울철 웰빙식품이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상품 가격도 만만치 않다. 이 지방에서는 무청이 주산물 대접을 받고 무는 부산물 대접을 받을 뿐이다.

여기서 나는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매독환주(買櫝還珠), ‘보석 상자(櫝)만 사고(買) 보석(珠)은 돌려줬다(還)’는 내용의 고사를 생각해 낸다. 초(楚)나라에 보석 장수가 있었다. 귀한 보석을 목련 나무로 만든 상자에 잘 넣어 정(鄭)나라에 팔러 갔다. 마침 보석을 산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비싼 값을 치르고 보석을 산 사람은 보석은 필요 없다며 돌려주고, 보석을 담은 나무 상자를 소중하게 들고 돌아갔다는 이야기. 비싼 보석을 보는 안목은 없고, 그 보석을 싼 빈 껍데기 상자에 집착해 큰돈을 낸 정나라 고객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이 관점은 보석은 아름답고 중요한 것이고, 보석 상자는 보석을 싸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그 중의 하나다. 초나라 장사꾼이 고객 수요를 잘못 판단했다는 것이다. 초나라 사람은 보석의 값어치는 알았어도, 정나라 사람이 보석보다는 잘 만들어진 나무 상자에 더욱 관심이 많다는 걸 몰랐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사람마다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보석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멋진 나무 상자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무가 좋은 사람도 있고 시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듯이 말이다.

우리는 세상만사 획일적으로 호, 불호(好, 不好)의 가치를 규정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모두 좋다고 하는 것도 나에게는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쪽저쪽 모두에 제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외모나 성장 배경,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불편함도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설명할 수 없이 오묘한 인간의 삶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꾸려나가는 이 세상을, 어떻게 한쪽의 생각만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다면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란 격언을 되뇌이면서 시래기국을 맛있게 들이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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