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특별기고] 산청 선비들의 독립 운동-면우 곽종석 선생과 파리장서 운동 _ 김덕현 산청교육지원청 교육장
[3.1절 특별기고] 산청 선비들의 독립 운동-면우 곽종석 선생과 파리장서 운동 _ 김덕현 산청교육지원청 교육장
  • 김덕현 산청교육지원청 교육장
  • 승인 2024.03.05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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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탈에 맞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산청 선비 중심에 서셨던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선생
1919년 3월,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파리장서운동을 이끌었다

그렇지만 세계를 향해 독립 의사를 직접 공포한
유림들의 ‘파리장서 운동’에 대해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 첫날부터
교육적 차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김덕현 산청교육지원청 교육장
김덕현 산청교육지원청 교육장

1. 선비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고장, 산청

산청은 남명 조식 선생의 꼿꼿한 정신이 살아 있는 실천유학의 고장이자 우국충정의 산실이다. 유학을 신봉하던 유림들의 선비정신은 지금도 지리산 천왕봉의 기상처럼 산청을 감싸고 있다고 지역민들은 느끼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분연히 일어났던 그 기상으로 일제 침탈에 맞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선비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선생이 있다. 1919년 3월, 각 지역 유림 대표들이 파리평화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내는 파리장서 운동을 이끈 총 대표가 바로 면우 선생이다.

산청에서는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남사천을 따라 유림독립운동기념관, 파리장서 기념탑을 건립하였고, 2022년 생가 복원과 함께 이곳을 ‘유림독립운동 100주년 테마공원’으로 꾸몄다. 이곳에는 1920년 유림과 제자들이 건립한 이동서당(尼東書堂)도 있다. 근년에는 선생께서 만년에 생활했던 거창 다전마을에 유허지 및 전시관이 문을 열어 면우 선생과 파리장서 운동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은 첫날부터 느낌이 사뭇 다르다. ‘대한독립 만세!’ 함성이 들리는 듯한 첫 3.1절로 시작하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계를 향해 독립 의사를 직접 공포한 유림들의 ‘파리장서 운동’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은 실정이다. 이에 산청교육지원청에서 추진 중인 특색과제 ‘산청 사랑과 선비교육 활성화’ 차원에서 면우 선생을 중심으로 파리장서 운동의 거사 배경과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파리장서 운동의 거사 배경

3.1운동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전 민족이 참여한 항일투쟁의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세계 혁명의 신기원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운동은 국내뿐 아니라 중국 베이징 학생들의 항일운동이자,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혁명인 5.4운동과 인도의 비폭력 저항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3·1운동의 준비 경과를 보면, 1919년 2월, 천도교 측이 주관이 되어 불교, 기독교 대표와 연합을 시도하였다. 그렇지만 저간의 사정으로 유교계는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손병희 등 다른 종교 지도자들은 민족을 대표하여 3.1운동을 주도한 데 비해 유독 유림 대표만 여기에 이름이 빠져 버렸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거행된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현장에 참석했던 김창숙•김정호 선생 등은 “독립 선언서의 민족 대표 명단에 유림이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음은 우리 유림의 수치”라고 하며 통탄하였다. 망국의 현실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일에 유림들이 수수방관한 듯한 모습으로 비친다면, 당시 유림들은 공리공론만 일삼는 사대주의 무리라는 지탄을 받기에 충분할 지경이었다.

그해 3월 3일, 이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들은 대개 마흔 전후의 장년층 유림들이었으며 오래전부터 교분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 중심에 면우 선생의 제자인 심산(心山) 김창숙(1879~1962)이 있었다. 그는 “지금 프랑스에서 파리평화회의가 열리고 있으니 우리 유림이 연명(聯名)으로 독립 승인을 요청함이 좋겠다.”라고 주장하면서, “이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일명 파리장서)를 보내자”라고 제안하자, 즉시 찬동하며 실행에 나서기로 했다.

이어 전국적으로 명망 높은 유림 인사를 지도자로 삼고, 지역을 대표하는 유림을 움직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래야만 전 유림들을 결속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말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거사 준비였다. 이때 총 대표로 추대되어 독립 청원서(파리장서) 작성과 거사를 총괄했던 분이 바로 영남의 거유였던 면우 곽종석 선생이다.

3. 면우 곽종석 선생과 파리장서 독립운동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선생은 1846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마을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총명하여 성리학 경전을 비롯한 역사서는 물론 정치, 제도, 군사, 의술 등 다양한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5세가 되면서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서 주리론(主理論) 및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계승ㆍ발전시키면서도, 남명학(南冥學)의 복원과 확산에도 관심을 쏟아 『남명집』을 중간하였다. 영남 유림은 물론 기호지방의 이항로나 김복한 선생, 호남의 전우와 기정진 선생, 양명학파의 황원이나 김택영 선생 등과도 소통하면서 어느 당파에도 구속되지 않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면우 선생이 장년기를 맞이한 한말과 일제 초기는 국권 침탈과 상실의 민족 시련기였다. 그는 퇴계(退溪)의 학문과 남명(南冥)의 기상을 가진 선비로서, 실천을 중시하는 유학자의 면모를 삶 속에서 보여주었다. 현실 대응에 있어서도 ‘우리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자정(自靖)과 만국공법(국제법)을 통한 외교적 모색을 중시하였다.

그는 1896년 일본인들의 난행과 패악을 각국 공관에 ‘천하포고문(天下布告文)’으로 성토한 적이 있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매국오적(賣國五賊) 처단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한일합방) 소식을 듣게 되자 통곡하면서 여러 날 식음을 전폐하였고, 절의를 지키겠다는 의미로 이름도 ‘곽도(郭鋾)’로 고쳐 버렸다. 이후 망국의 신하를 자처하면서 세상과 담을 쌓고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다전마을에 두문칩거하며 제자 양성에만 관심을 가졌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팽배했던 윌슨(Wilson)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와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독립의 희망을 키워 가던 중, 1월 고종이 죽고 독살설까지 유포되자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그는 평소 무력 항쟁 대신 일본의 침략 행위를 국제 사회에 폭로하여 서구 열강의 개입을 호소하는 국제법에 따른 세계 질서를 수용하고자 하였다.

그해 3월, 유림 대표로 나서달라는 요청에, "망국의 대부(大夫)가 되어 항상 죽을 땅을 얻지 못함을 슬퍼했는데, 이제 죽을 땅을 얻어 대의에 죽게 되었으니 다시없는 영광이다."라며 기꺼이 수락하였다. 그는 효당 장석영 선생이 작성한 독립청원서 초안을 다듬어 2,674자의 독립청원서를 완성한 후 제자인 김창숙으로 하여금 파리평화회의에 제출케 하였다. 여기에는 137명의 각 지역 유림 대표가 서명했다. 기호지방 유림의 우두머리였던 지산 김복한(1860~1924) 선생도 함께했다. 서명자도 진주, 산청, 거창, 성주, 봉화, 안동 등 영남권과 기호지방인 공주, 청양 등 전국적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인원별로도 경북 61명, 경남 41명, 충남 18명, 그 외 17명이라는 분포가 보여주듯 면우 선생을 중심으로 한 영남권 유림들이 주도가 된 운동이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완성된 독립 청원서(파리장서)를 중국 상하이로 가져가 번역·인쇄하고 파리로 향하던 김규식을 통해 파리 파리평화회의와 각국 대표에게 부쳐 보냈다. 4개 국어(영어ㆍ독일어ㆍ불어ㆍ중국어)로 번역된 독립 청원서는 중국 전 지역과 언론기관 및 해외동포가 거주하는 지역, 한국의 각 서원에도 우편으로 발송되었다. 이에 놀란 일본 조선총독부는 ‘유림단 사건’이라고 명명하여 관련자들을 체포ㆍ구금하기 시작했다.

면우 선생은 심산 김창숙이 중국으로 떠나던 3월 18일 거사의 주동자로 체포된 후, 21일 검사국에서 신문을 받고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22일 병감으로 이송되었다. 일본 관계자들이 면우 선생에게 심하게 하대했지만, 그는 자기 집에서 지내는 것처럼 태연했다고 한다.

2년형이 구형되자, 선생은 “어찌 종신형으로 하지 않고, 단지 2년형을 언도하는가? 내가 여기 오면서 본래 살아서 돌아가는 것을 기약하지 않았네!”라고 했다. 감옥의 관리가 공소를 권유했을 때도 “구구하게 내 한 몸 때문에 원수에게 동정을 받아야 하겠는가? 꼭 공소를 한다면 아마 하늘에 해야 할 걸세!”라고 했다. 구금 이후 신문이나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면우의 의연한 기상은 유림들이 다시금 결집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옥고를 치르던 중 7월 19일 병보석으로 풀려나 8월 24일 74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면우 선생의 장례에 조문객이 1만 명에 이르렀는데 유림 대표로서 그의 위상과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유림과 제자들은 면우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생가가 있는 산청군 단성에 1920년 이동서당(尼東書堂)을 건립했다. 다음 해에는 거창군 가조에 다천서당(茶川書堂), 곡성에 산앙재(山仰齋)가 세워졌다. 1963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저서에는 『면우집』이 전한다.

4. 파리장서 독립운동의 의의

세상을 향해 ‘대한독립’을 뜨겁게 외치는 유림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3월이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겠다!”라는 파리장서 중 한 문장이 가슴에 깊이 새겨지는 춘삼월이다. 그날의 뜻을 담은 파리장서 기념비는 서울 장충단공원, 진주 덕곡서당, 거창의 침류정, 김해 연지공원, 밀양 영남루 인근, 합천 읍내 공원, 대구 월곡역사공원, 봉화 송록서원, 정읍 정읍사공원, 고창 석교리 등에 건립되어 있다. 앞서 밝혔듯 거창에는 유허지 및 전시관이 마련되었고, 산청에는 면우 선생을 중심에 둔 유림독립운동 100주년 테마공원이 조성되었다.

파리장서운동은 영남 유림의 영수인 면우 선생이 왕년의 의병장이요, 호남 유림의 우두머리인 지산 김복한 선생과 손을 잡고 거행한 무저항주의, 비타협주의 독립운동이었다. 물론 국내ㆍ외를 넘나든 심산 김창숙 선생의 활약과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들 모두 기억해야 할 애국지사들이다.

면우 선생을 비롯한 유림단은 현실 문제에 참여한 진정한 선비였다. 책만 읽고 도리만 논하는 고루한 유학자가 아니었다. 파리장서 운동은 서양을 맹목적으로 배척하는 척사론에서 탈피하여, 세계를 향한 ‘이(理)’의 구체적 실천으로 민족자주의 독립 논리를 펼쳤다는 데 의의가 있다.

운동 방법에 있어서도 3·1운동이 국내 중심의 ‘대내 투쟁’ 형식이었다면, 파리장서 운동은 유림들의 뜨거운 염원을 비밀리에 결집하고 그것을 국제무대에 공포하며 투쟁했다는 데서 차이가 크다. 그의 손자인 곽진 이사장의 “파리장서 운동은 당시 파격적인 서양 인식 태도로 중화주의로부터 이탈을 보여주었고, 유림들이 그간의 갈등을 딛고 어렵게 통합의 길을 열었다.”라는 견해도 공감을 주고 있다. 이로써 면우 곽종석 선생이 중심이 된 파리장서 운동은 3.1운동과 함께 20세기 우리 지성사(知性史)를 한 단계 높였다는 인정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참고 문헌>

『파리장서와 유림의 독립운동』 (유림독립운동기념관 펴냄), 2013.

『조선 최후의 지성, 면우 곽종석』 (조홍근 지음, 어우름), 2019.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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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리로 보내는 긴 편지’라는 뜻으로 1919년 3월 파리평화회의가 열리는 파리에 보낸 한문체로 작성된 2,674자의 대한제국 독립청원서(大韓帝國 獨立請願書)를 「파리장서(巴里長書)」라고 부른다.

2) 파리평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쟁 책임과 유럽 각국의 영토 조정 등을 처리하기 위해 1919년 1월부터 1920년까지 개최된 회의를 말한다. 5개월간의 기본협의(평화회의)와 패전국과의 조약협상(강화회의)를 합쳐 파리평화회의라고 부른다.

3) 산청 출신 파리장서 서명자 중 약헌 하용재(1854~1919) 선생도 11월 8일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산청 출신으로 정부포상이 추서된 항일 투사는 총44이다. 이 중 6명(곽종석, 박규호, 박정선, 조현규, 하용재, 김황)은 파리장서 관련 활동을 한 분이다.(‘유림독립운동기념관’ 안내자료 참조)

4)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이후에도 1925년 8월 베이징에서 서울로 잠입하여 비밀결사 조직인 「신건동맹단」을 조직하여 친일 부호 위협, 군자금 확보 등 제2차 유림단 의거를 전개하였다, 국내ㆍ외를 넘나든 그의 활동은 독립의 열기가 식어가던 1920년대 중반, 독립운동의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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