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특별기고] 105주년 3.1절을 맞이한 진주정신과 항일운동(抗日運動) _ 김길수 진주문화원 원장
[3.1절 특별기고] 105주년 3.1절을 맞이한 진주정신과 항일운동(抗日運動) _ 김길수 진주문화원 원장
  • 김길수 진주문화원 원장
  • 승인 2024.03.05 10: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의정신과 지행일치’ 남명의 가르침이
임진왜란 국가적 위기에서 의병으로 이어지고
농민항쟁과 형평운동 같은 민권운동의 원동력이 되고
다시 일본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는
호국정신으로 면면이 이어져
진주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
김길수 진주문화원 원장
김길수 진주문화원 원장

우리나라는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고유문화와 전통을 유지해 왔으나 때로는 외세의 침략으로 자주성을 상실한 시기도 있었다. 그 가운데 일제의 침략으로 조국을 빼앗기고 국치(國恥)를 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정책을 반대하며 입신양명이나 부귀공명을 초개같이 던져 버리고 오직 조국의 독립과 자주성을 위해 일제에 대항한 항일애국지사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지금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 성장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으니 이는 수많은 애국선열의 피나는 투쟁의 대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애국지사와 열사(烈士)가 존경받는 사회, 그 자손들이 우대받는 사회가 될 때 정의의 사회가 되는 것이다.

3.1절은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로 우리나라의 국경일이다. 그래서 3.1절 국경일을 앞두고 당시의 애국지사들이 목 놓아 외쳤던 ‘독립선언서’를 먼저 회고해 본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3.1 독립선언서(출처 문화재청)
3.1 독립선언서(출처 문화재청)

이 선언은 오천 년 동안 이어 온 우리 역사의 힘으로 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은 것이다. 우리 민족이 영원히 자유롭게 발전하려는 것이며, 인류가 양심에 따라 만들어가는 세계 변화의 큰 흐름에 발맞추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고 시대의 흐름이며, 전 인류가 함께 살아갈 정당한 권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 독립을 가로막지 못한다. ...” (중략)

태화관 _ 애국지사들의 밀담의 장소
태화관 _ 애국지사들의 밀담의 장소

위의 독립선언서에 보았듯이 3.1운동은 100년의 세월이 훨씬 지나 2024년 청룡의 해에 맞이하는 3.1절은 105주년이나 되는 해이다. 이 뜻 깊은 해의 3.1절을 맞이하여 오로지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선열의 의로운 정신을 되새기고 기리기 위해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그 맥을 이어온 ‘진주정신’과 ‘항일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진주에는 오랜 기간 쌓아온 ‘진주정신’의 역사가 있었다. 1592년 김시민 진주목사가 군사 3800여 명으로 왜군 2만여 명을 물리친 진주성대첩, 촉석루 암 남강가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절한 의기(義妓) 논개, 의병정신 등은 진주의 주체정신과 분명히 일치하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남명 조식(曺植)선생은 우리 민족 정신사의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의(義)를 보고 행하지 않는 위선을 꾸짖고 진정한 선비 상(像)을 지행일치와 행동유학을 실천함으로써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명은 ‘경의정신과 지행일치’라는 실천적 학문을 강조했다. 때문에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켜 분연히 일어선 것은 남명의 실천적 학문이 토대가 됐다. 이런 정신이 임술 농민항쟁과 형평운동 같은 민권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조선조 후기 진주에서 민권운동이 제일 먼저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불의를 보고 좌시하지 않는 진주 사람들의 호의(好義)정신의 발로였다. 이와 같이 오랜 역사 속에서 이뤄온 ‘진주정신’은 앞으로도 긴 시간 쉽게 소멸되지도 않을 것이며 결코 소멸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또한 항일운동의 시발점이 된 의병운동의 역사를 보면 조선시대부터 진주를 비롯한 경상우도 지역은 왜적에 맞서 수많은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 시작부터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동래성 전투’, ‘부산진 전투’를 비롯하여 ‘김해성 전투’, ‘의령 정암진 전투’, ‘진주성 전투’, ‘사천성 전투’, ‘함양 황석산 전투’ 등 격전지가 경상우도였고, 이순신·원균 등이 수십 차례 해전을 치른 곳도 주로 경상우도 앞바다였다. 특히 7만 민관군이 순절한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전국 어디에도 견줄 것이 없는 장엄하고 숭고한 희생이었다. 그러한 정신이 이어져 일제 침략기(1894~1910) 때 일제에 당당히 맞서 일어선 진주의병은 적게는 2,000명에서 많게는 1만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의병부대를 형성하여 일본 군경과 당당히 맞서 싸웠으며 특히 1896년 2월부터 4월까지 2개월 동안은 경상남도에 일본군은 물론, 일본 상인조차 혼비백산하여 도망쳐 말 그대로 의병 천국이었다. 이와 같이 진주는 1925년까지 부산·울산을 포함한 경남의 수부(首府)로서 행정·문화·예술의 중심지였고, 특히 ‘의향(義鄕)’으로 전국 으뜸이었다. 이와 같이 ‘진주정신’과 ‘항일운동’그리고 3.1운동 정신은 우리 진주시민의 가슴에 늘 살아 숨 쉴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대로 988, 4층 (칠암동)
  • 대표전화 : 055-743-8000
  • 팩스 : 055-748-14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선효
  • 법인명 : 주식회사 경남미디어
  • 제호 : 경남미디어
  • 등록번호 : 경남 아 02393
  • 등록일 : 2018-09-19
  • 발행일 : 2018-11-11
  • 발행인 : 황인태
  • 편집인 : 황인태
  • 경남미디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미디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7481400@daum.net
ND소프트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이선효 055-743-8000 74380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