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수우당 최영경 성생의 학덕을 기리는 도강서당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수우당 최영경 성생의 학덕을 기리는 도강서당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7.1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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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당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드러난 제자
서울서 태어났지만 진주서 살다가 기축옥사에 연루

훗날 선조가 최영경을 제사지내기 위해 하사한 제문
돌에 새긴 비석 ‘선조사제문비(宣祖賜祭文碑)’
덕천서원 마당에 세웠다가 진주 도강서당으로 이설

<35> 진주지역 서원(書院)과 선현(先賢) <16>

진주시 상대동에 위치한 도강서당(道江書堂).
진주시 상대동에 위치한 도강서당(道江書堂).

목지암(木之岩) 영구강(營丘岡)

목암에 언덕을 다듬었으니

사척봉(四尺封) 공지장(公之藏)

네 척의 봉분은 공의 무덤이라네.

신가사(身可死) 수익광(守益光)

몸은 죽을지라도 지킨 바는 더욱 빛나구나.

석우차(右于此) 풍자장(風自長)

이 곳에 비를 세우니 위풍이 절로 전해지리라.

상기 시문은 고양시 목암마을에 있는 수우당 최영경의 묘갈문이다. 이 묘갈문은 1603년 선조 36년에 진주출신 강극신(姜克新)이 생전에 수우당 선생과 친분이 두텁고 또 가르침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우(士友)들과 함께 비(碑)를 세우고 직접 비문(碑文)을 명(銘)했다.

또한 그의 저서로는 수우당실기(守愚堂實記)가 있는데 이 책 속에는 선조의 사제문(사祭文), 시문 7수, 서(書), 소(疏), 행장 등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제두류산(題頭流山)’, ‘제가야산(題伽倻山)’은 그의 뛰어난 시제(時才)와 높은 학문의 명망을 나타낸다.

본 서는 최영경 본인의 실기로 1700년(숙종26)에 양천익이 편집·간행했고, 1935년 정영훈, 김원적 등이 ‘은대록’, ‘승정원일기’ 및 선유들의 문집 중에서 저자에 관한 사실을 모아 5권2책으로 간행했다.

1796년 정조는 남명 조식에 대하여 친히 제문을 내려 그 학덕을 추모한 바 있는데, 이로 인해 강우(江右) 지역 학자들이 1623년의 인조반정과 1728년의 무신난 이래 쇠잔해진 문풍을 크게 일으키게 되었다. 1902년까지 덕천서원 마당에는 남명 조식에 대한 정조사제문비와 수우당 최영경에 대한 선조사제문비가 각각 동쪽과 서쪽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남명에 대한 선조사제문비는 없어졌고, 수우당 최영경에 대한 선조사제문비는 이 도강서당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제문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력 이십 이년(1594년) 세차 갑오 십이월에 국왕이 신 예조정랑 정홍좌를 보내어 증 사헌부 대사원 최영경의 령에 고하여 제사를 지내노니 유영(維靈)은 아아 슬프다 어쩔 수 없도다. 그 죄 무엇인가. 화가 그대에게 전가되었도다. 경은 아름다운 선비, 물외(物外)에 우뚝 서서 높은 품격과 뛰어난 절개는 넉넉히 풍속을 다듬고 세상에 운둔한 지 십년에 생추(生芻) 한 묶음이로다. - 중략 - 이에 제문을 내려 애오라지 슬픈 정성을 펴노니 정령이 있거든 흠향하기 바라노라.

수우당은 원래 서울사람이었는데 조정의 당쟁이 심한 것을 보고 47세 때 진주로 내려와 도동의 만죽산(萬竹山 지금의 선학산) 기슭 한적하고 탁 트인 대나무 숲 가운데 집을 지어 ‘수우당(守愚堂)’이라고 했다. 이로부터 매화와 국화를 심어놓고 흰 학을 기르면서 좌우에 책을 쌓아 심성을 수양하면서 스스로 즐겼다 한다. 수우당은 정여립 모반사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62세의 일기로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으나, 1594년 억울한 누명은 벗겨지고 대사헌(大司憲)으로 추증되었으며, 특별히 선조가 예관을 보내 제문을 내려 충절을 기렸다. 그 유적이 지금 도강서당에 남아있는 것이다.

수우당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드러난 제자로 덕천서원(德川書院)에 배향되었던 남명학파의 대표적 선비이며 ‘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에 덕계(德溪) 오건(吳健)에 이어 두 번째로 등재되어 있는 인물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남명 선생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기 위해 지리산 근처 진주로 내려와 도동 만죽산 아래에 살다가 모함으로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선비이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후, 1591년 정철 등 서인들의 모함이 밝혀져 신원되었으며 1594년 대사헌에 추증되었고 1603년에는 스승인 남명 선생을 모신 덕천서원에 배향되기도 했다. 1868년 서원 훼철령으로 덕천서원이 훼철되자 1918년 하동 옥종의 존덕사(尊德祠)에서 향례를 지냈고, 1936년에는 지역 유림들이 도강서당(道江書堂)을 건립해 지금껏 그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도강서당은 진주시 상대동 선학산 자락에 있는데 수우당이 진주로 내려와 자연을 벗 삼아 경서를 탐독하던 유서 깊은 장소에 도강서당을 건립한 것이다.

도강서당(道江書堂) 내 ‘선조사제문비(宣祖賜祭文碑)’. 선조가 내린 제문을 돌에 새긴 비석으로 경남도 유형문화재 378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강서당(道江書堂) 내 ‘선조사제문비(宣祖賜祭文碑)’. 선조가 내린 제문을 돌에 새긴 비석으로 경남도 유형문화재 378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진주시 상대동에 ‘선조사제문비(宣祖賜祭文碑)가 있다. 선조가 내린 제문을 돌에 새긴 비석으로 경남도 유형문화재 378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비석은 진주시 상대동 도강서당(道江書堂)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여립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은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조선 14대 왕인 선조가 제문을 내리자 이 제문을 돌에 새겨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은 원래 1821년 덕천서원의 마당에 세웠던 것으로, 이것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에 대한 정조사제문비를 세우는 것과 같이 이루어졌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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