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이순신 장군은 현재 율 모여곡(毛汝谷) 이어해(李漁海) 집에 묵어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이순신 장군은 현재 율 모여곡(毛汝谷) 이어해(李漁海) 집에 묵어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11.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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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취득한 정보와 자료들을 심도있게 연구한 결과
임란 당시 합천에는 권율 원수진(元帥陣)만 있었고
권율 도원수부(都元帥府)는 결코
설치되었거나 존치한 적이 없었다는 것으로 결론
이 충무공 합천지역 백의종군로 표지석.
이 충무공 합천지역 백의종군로 표지석.

>글 싣는 순서<

㊤ 1. 문제 제기와 연구 목적

2. 난중일기 정유년 6월4일자 일기문

3. 난중일기 정유년 6월4일자 일기 해설

㊦ 4. 합천지역 이순신 백의종군로와

권율 도원수부 위치 고찰

5. 결론

※이 글은 지난 6월 합천박물관에서 합천지역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와 권율 도원수부의 위치를 규명하고자 창원대학교박물관이 주관해 열린 학술대회에서 본지 주필이자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인 강신웅 박사가 주제발표한 ‘합천지역의 이순신 백의종군로와 권율 도원수부 위치’이다. 지면관계상 일부 생략하였음을 양해 바라며, 원문은 본보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지난 호에서 본고에서는 앞서 전해오는 많은 고전 문헌자료와 전대 학자들이 남긴 연구 결과물을 근거로 심도있게 살펴본 결과, 초계치소에 도원수부(都元帥府)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근거를 결코 인정할 수 없으며, 실제 초계치소에는 도원수부(都元帥府)가 설치되지도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그 이유를 정확한 여러 관련 자료들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4. 합천지역 이순신 백의종군로와 권율 도원수부 위치 고찰

⑴ ‘난중일기’ 자료 중심으로

‘난중일기’에 의하면, 충무공은 율곡면 낙민리 2구 모여곡(毛汝谷)의 이어해(李漁海) 집에 묵었고, 그곳으로부터 5리쯤 떨어진 곳에 부(府)가 아닌 진(陣)이 있었다고 나타나 있다. 이미 언급했던 ‘난중일기’ 정유년 6월 4일자 일기의 내용을 다시 살펴본다면, “아침 일찍 떠나려는데, 삼가현감(신효업)이 … 모여곡(毛汝谷)이다”로 기록되어 있다.

⑵ 기타 자료 ‘與地圖書’, ‘亂中雜錄’을 중심으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보면, 초계현에서 15리 거리에 낙민원(樂民院)이 있고, 낙민원 위에 낙민정(樂民亭)이 있다고 되어있다. 원래 원(院)은 벼슬아치가 묵던 공공숙소이며, 정(亭)은 사방이 트인 정자(亭子)이다. 당시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발발 5년이 지나면서 왜적들이 객사(客舍)등 관청을 불태워버려, 권률 도원수는 낙민정을 거의 사용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권율 도원수는 타지역(순천, 광주, 나주, 구례, 남원, 경주, 거제, 창녕, 의령, 삼가, 진주, 함양, 고령, 성주, 사천, 울산 등)을 수시로 이동하면서 전쟁를 지휘해야 했기 때문에, 고정된 규모가 큰 지휘본부(관청, 府)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고령 출신으로 남명(南冥)의 제자인 초계군수 곽율(郭走日)이 쓴 ‘팔계일기(八溪日記)’에 보면, “초계관사 등은 1592년 9월 12일 밤에 왜적이 또 객사와 창고를 태우고 도주했다(賊焚蕩客舍倉庫而逃走)”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조선중기 의병장이었던 정경운(鄭慶雲)이 쓴 ‘孤臺日錄’에서도 1593년 7월 5일에 관사(館舍) 일체가 잿더미로 변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전치원(全致遠)의 ‘濯溪文集)’에서도 그 화재를 확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권율이 초계현의 도원수로 내려왔을 때에는 사용할만한 관사(館舍)나 객사 등 관청건물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동시에 당시의 도원수부(都元帥府)는 원래 규정상 각도에 1개씩만 설치되어 있어서, 경남에는 창원부, 경북은 안동부, 전남은 순천부 등의 당해도의 중심도시에 1개씩 설치 되도록 규정되었기 때문에 결코 합천군의 草溪(초계)치소에는 결코 원수부(元帥府)가 설치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원수진(元帥陣)에 대해서 살펴보면, ‘난중일기’ 6월 4일자 일기의 뒷부분에 보면 “강을 건너지 않고 가다가 거의 십리쯤 가니 원수진이 보였다. 문보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 잤다. 고개를 끼고 넘어오는데, 기암절벽이 천길이나 되고, 강물은 굽이 돌며 깊고, 길은 험하고 다리는 위험하더라. 만일 이 험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만명의 군사라도 지나가지 못하겠다”의 일기문을 면밀히 분석하면, 원수진의 위치와 이순신 장군의 유숙했던 곳이 어딘지를 확실히 알 수 있으나, 원수부의 존재나 위치는 결코 상상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충무공이 합천에서 유숙한 이어해의 집 표지석.
이 충무공이 합천에서 유숙한 이어해의 집 표지석.

다음 일기에 “합천과 초계로 가는 갈림길에서(현 대양면 정양 쌍다리 지점) 십리 남짓 가서 원수진을 바라보았다” 했으니, 작은 개벼리 쯤에서 원수진의 깃발을 보고, 멀리 떨어진 원수진을 식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도원수의 군진(軍陣) 또는 군영(軍營)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깃발은 수자기(帥字旗)를 비롯한 군사지휘에 필요한 여러 깃발이었을 것이나, 멀리서 식별할 수 있는 큰 깃발 역시 수자기(帥字旗)였다.

여기서 충무공이 바라본 원수진은 군대가 업무(작전, 훈련 등)를 수행하기 위해 마련된 일종의 군막으로, 당시의 위치는 초계군 율곡면 영전리 1구이고, 이곳에 물이 차거나 훈련이 어려우면, 벽전리(碧田里)에 가서 훈련이나 기타 업무를 수행했으며, 이곳에서 충무공과 권율 도원수와도 다섯여 차례 만나고, 황강 가에서도 한 차례 만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초계(草溪)치소에 설치되었다는 도원수부(都元帥府)는 상기와 여러 개의 뚜렷한 이유로, 또 당시 현지 (초계관사와 객사등)의 왜구에 의한 수차례 화재와 아울러 당시의 도원수부(都元帥府)라는 기구는 각 도(道)에 한 곳씩만(경남은 창원부, 경북은 안동부, 전남은 순천부 등등) 설치되는 국가기구 조직의 원칙이 있었던 까닭에, 구태여 경상우도의 초계(草溪)에 설치될 이유도 근거도 없기 때문에, 초계치소에는 도원수부(都元帥府)라는 기구는 결코 설치된 적도 없음을 기술한다.

그러나, 초계의 원수부와 관련이 있는 자료로 추측되는 자료로써, 조경남(趙慶男)의 ‘亂中雜錄’에 나타난 원수부와 원수진에 관한 기록으로, 이 책의 1593년 12월 기록에 “… 도원수 권율이 또한 왕명을 받들어 합천으로 진영(陣營)을 옮겨 과거를 보여 무과 9백인을 뽑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충무공의 ‘난중일기’에서도 원수부라는 명칭을 세 차례(6월 19일자, 6월 25일자, 7월 23일자)씩이나 기술했는데, 그것이 모두 초계에 설치된 원수부인지에 대한 설명이나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없는 실정이다.

더욱이, 그의 ‘난중일기’ 6월 19일자의 내용에 의하면, “1593년 6월 권율이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된 그해 12월에 원수부가 합천군으로 옮겨진다”라는 기록은 있는 데, 그 이후 원수부가 언제 다시 초계군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과연 초계에 원수부를 세운 확실한 시기와 장소를 결코 알 수 없다. 또 그 당시는 전쟁도 이미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특히 1597년 7월까지는 이렇다 할 전투도 없는 상황이므로, 초계는 물론 합천에도 원수부(元帥府)라는 체제가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 또 충무공이 원수진(당시 율곡면 영전리 1구 지역)에 머무는 동안 그가 초계치소에 갔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말은, 결국 초계치소에는 원수부(元帥府)라는 기구가 처음부터 존치(存置)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난중일기’에 보이는 합천지역의 원수부(元帥府)라는 명칭을 한자로 표시하면, 元帥府의 府자가 군부대(軍部隊)의 부(部)자로 혼돈해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기 마련이다.

5. 결론

본인은 지금까지 ‘합천지역의 이순신 백의종군로와 권율 도원수부 위치’라는 주제로, 1. 문제의 제기와 연구 목적. 2. ‘난중일기’ 정유년 6월 4일자 일기문. 3. ‘난중일기’ 정유년 6월 4일자 일기 해설. 4. 합천지역 이순신 백의종군로와 권율 도원수부의 위치 고찰의 소제(小題)들을 설정하여 논설을 전개해 왔다.

사실 이번 발표 논제의 핵심 문헌자료인 ‘난중일기’는 충무공의 충절과 한편 아픔과 고통, 그리고 자신에 대한 지극히 강한 호소조의 일기서체의 글로써, 실제 후대인들이 그분의 진정한 내면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자료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간 그분의 ‘난중일기’에 대한 번역본이 20여편 출간되었지만, 번역작업에 동참했던 모든 분들의 결론은 충무공이 자기의 그 일기에서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와 내용을 완벽하게 표현해 낼 수 없었다고들 말하고 있다.

하여, 그간 ‘난중일기’ 중심의 이순신 연구나 백의종군로 연구 등의 연구에서 많은 학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합천지역 출신으로써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학자나 지역 향토사학자들에게는 어려움이 더욱 심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 이유는, 충무공께서 그의 백의종군 기간 중에 합천에 장기간 체류했으며, 또 그의 ‘난중일기’에 쓰여진 난해한 서체와 문장구조, 특수한 어휘 등으로 표기된 인명, 지명, 관직명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아직도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많은 후대 학자들의 연구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며, 지금도 이 분야에서는 다양한 이론(異論)과 반론(反論)이 전개됨으로써 관련학계가 매우 혼란스러운 것 같다.

특히 금번 ‘이순신 백의종군로와 권율 도원수부의 위치에 대한 학술대회’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다. 결국 원문 번역의 오류로 인한 다양한 논쟁이 발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은 장기간 합천 현지에 머물면서, 현지인과의 빈번한 토론, 그리고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관련 자료들을 어렵게 구하고 수집하여 나름대로 그들 문헌과 자료검토와 함께 지역출신의 학자는 물론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연구서와 그분들의 주장들을 충실히 탐구 정리했다.

그 결과, 본고에서 본인이 취득한 정보와 자료들을 심도있게 연구한 결과, ‘사실상 임란 당시 합천에는 권율 원수진(元帥陣)만 있었고, 권율 도원수부(都元帥府)는 결코 설치되었거나 존치(存置)한 적이 없었음’을 본 주제의 결론으로 기술하는 바이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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