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8. 고려시대 진주인의 지역정신(地域精神) 형성과정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8. 고려시대 진주인의 지역정신(地域精神) 형성과정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2.1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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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민란인 정방의(鄭方義)의 난 중심으로
지방관의 수탈에 반발해 일어난 최초의 민란 정방의의 난

고려시대 진주 호족들이 부상하면서 큰 고을로 급성장
고려말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혼란의 시대 전개
신종 3년(1200년) 노비들이 향리(鄕吏)들 집 불사르고 난동
향리 정방의가 반란혐의 쓰자 무리를 규합해 관아 점거

 

수개월간 공권력으로도 진정시키지 못할 정도로 무법천지
결국 진주 사람들이 나서 정방의 형제를 진압해 사태수습
공권력의 수탈에 저항하는 진주 사람들의 저항에 큰 의의
차후 진주정신이란 독특한 지역정신 형성에 바탕이 됐다

6400명을 죽이고 진주지역을 1년간 지배하던 고려시대 최초의 만란 ‘정방의의 난’을 묘사한 드라마 중의 한 장면.
6400명을 죽이고 진주지역을 1년간 지배하던 고려시대 최초의 만란 ‘정방의의 난’을 묘사한 드라마 중의 한 장면.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 초기까지 진주는 진주목(晉州牧)이라는 거대한 행정적 지역으로써 뿐만아니라, 동시에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초월하여 거의 중앙의 통치력 이상을 행사했던 호족(豪族)들이 진주에서 독자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외교적 능력까지 과시했던 명실공히 큰 고을로 급성장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이르면서 무신정권이 국가 공권력인 왕권체제를 무력화시키면서 고려왕조는 급기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시대가 전개되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 따라 신종 3년(1200년)에 진주도 지역의 향리(鄕吏)에 불과한 정방의(鄭方義)를 중심으로 한 폭력집단에 의해 수개월간 장악당하면서 공권력으로도 도무지 진정시키지 못할 정도로 무법천지가 되기에 이르렀다.

소위 ‘정방의(鄭方義)의 난’은 당시 고려 무신정권 시대에 전국적으로 빈번히 일어났던 민란 중 하나로, 진주에서 전개되었던 사건이었다. 당시 진주지역 백성들이 처한 상황과 진주지역 토호와 향리들의 강성했던 세력을 이해하는데 좋은 사례가 된다.

사건의 발단과 경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고려 신종 3년(1200년)에 진주의 공·사 노비들이 무리를 지어서 난동을 일으켜 고을 향리의 집 쉰여 채를 불사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곧 목사에게 보고되어 난동을 일으킨 노비들은 체포하였다. 이때 정방의의 집도 불에 타게 되었는데, 사태가 진정될 즈음 정방의가 무장을 한 채로 사록(司錄) 전수룡(全守龍)을 찾아간 일이 문제가 되어 그에게 반란의 혐의가 있다고 하여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국문을 앞두고 정방의의 아우가 그의 형을 옥에서 빼낸 다음 많은 무리를 모아 고을 안을 휘저어 다니면서 평소 원한이 있는 자를 모조리 죽였다. 이때 죽임을 당한 사람이 육천 수백명에 이르렀다. 난동 무리는 관아를 점령하고 목사를 위협해 공무를 보게 하는 한편 읍내의 많은 재물을 모아 조정의 권력자에게 뇌물을 써서 난동의 책임을 면하려 했다.

중앙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당시 진주 인근 고을을 순행하던 안찰부사가 진주에 이르러 진상 조사를 하였다. 그러나 공포에 질린 주민들은 정방의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거짓 진술하여 결국 진주목사만이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이후 사태의 심각성이 중앙에 알려져 재차 관리가 파견되었으나 정방의가 군사를 훈련하고 살생을 마음대로 하는 따위로 무법천지가 되었는데도 이들은 현지에 도착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였다.

정방의 일당의 폭압은 결국 관변 측의 개입이나 진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국 진주 주민에 의해 수습되었다. 처음에는 정방의와 틈이 있는 자들이 주동이 되어 당시 인근 합주(지금의 합천)의 반란세력과 연결하여 정방의 일당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 두 세력의 무력 충돌은 정방의 일당에 의해 오히려 이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후의 사태는 추이가 분명치 않으나 이듬해에 진주 사람이 정방의를 쳐서 죽여 진주성을 점거하게 되고, 이에 정방의의 아우 정창대가 200명의 무리를 이끌고 진주성에 침투하려는 것을 진주 주민들이 진압함으로써 사태가 마침내 진정되었다.

이러한 신종 3년(1200년) 진주에서 일어난 정방의의 난동사태에서 주목되는 것은, 난동의 시작이 진주의 공·사 노비들이 봉기하여 고을 향리들의 집을 불사르는 사건에서 발단이 되었다는 점, 사태의 수습과 진상조사 국면에서 정방의 일당이 무리를 모아 평소 원한이 있는 자를 모조리 죽이고, 이로써 진주 고을을 장악하게 되었다는 점, 이에 대해 정방의와 틈이 있는 자들이 주동이 되어 인근의 반란세력을 끌어들여 이들 정방의 일당에 대항하려 하였다는 점, 사태가 관변의 개입에 의해 무마되지 못하고 결국에는 진주 주민에 의해 수습되었다는 점, 같은 여러 가지로 당시 고려라는 나라의 공권력이나 지방 수령들의 통치력이 얼마나 무기력 했는 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정방의의 난동이 공·사 노비들이 고을 향리의 집 쉰여 채를 불사르는 사건에서 당시 최하층 민중의 1차적인 공격 대상이 향리였음이 드러난다. 향리는 수령을 도와 징세와 조역 같은 지방행정의 실무를 직접 담당하는 하급관리다. 무신정권이 일어선 뒤로 국가의 통치 기강이 풀어져 버리고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됨에 따라 당시 각지의 향리들은 이를 기화로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진주지역의 사태에서 공·사 노비가 봉기하여 시도한 첫 번째 행동이 고을 향리들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불태운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편 정방의 일당이 무리를 모아 평소 원한이 있는 자를 모조리 제거하려 하였다거나, 이에 정방의와 틈이 있는 자들이 주동이 되어 인근의 반란세력을 끌어들여 정방의 일당에 대항하려 했다는 사실에서, 당시 진주지역 토호세력 간에 내부적으로 심각한 알력과 긴장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알력 관계의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정방의로 대표되는 정씨 일문이 이러한 알력 관계의 한 축에 섰던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강, 하, 정, 유, 소, 임, 강(康)의 진주지역 토성 일곱 사이에 분열과 알력이 있었다면 이는 당시 무신 최고 집정자인 최충헌의 외가가 유씨였던 것과 어떤 관련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무신정권 시대라는 새로운 정치적 환경과 최충헌의 외가가 진주였다는 사실이 진주지역의 토호세력 간에 분열과 알력을 조성했고, 이는 공·사 노비에 의해 고을 향리의 집 수십 채를 방화하는 사건을 계기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했던 것이다.

정방의의 난동이 진정된 다음 진주지역은 안정을 되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난이 평정된 3년 뒤에 진주가 당시 무신 최고 집정자인 최충헌의 식읍이 되는 데서 알 수 있다. 희종 1년에 최충헌에게 내장전 백결을 하사하는 한편 그를 진강군으로 봉하고 식읍 2000호에 식실봉(食實封 나라에서 공신에게 큰 동네 <수백호>를 내려 주어 당해 동네의 모든 세금을 독차지하고, 용역(庸役)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제도) 삼백 호를 내리고, 이듬해에는 다시 진강후(晉康侯)로 삼고 흥녕부라는 관부를 세워 소속 관원을 두고 흥덕궁을 이에 소속시키고 있다. 흥녕부는 뒤에 진강부로 고쳐졌다가, 최충헌의 아들 최우를 진양후로 삼으면서 진양부라고 하였다. 이렇듯 최충헌 부자로 이어지는 흥녕부, 진강부, 진양부라는 최씨 무인정권의 막부는 명칭으로 보아 막대한 재정상의 경비를 식읍지인 진주에서 충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진주성.
진주성.

식읍이란 일정한 읍락을 단위로 조세나 용역 같은 수취 항목 전반을 징수할 수 있는 경제적 지배권이 허락된 곳으로 식읍주는 식읍호로 책정된 식읍민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수취하였다. 식읍호에서 세금을 거두는 방식은 국가 기관을 거치지 않고 식읍주가 직접 징수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물론 행정상 해당 고을의 관청에서는 식읍주의 조세 수취에 협조함과 아울러 그 물량을 감독하는 따위 수납 과정에서 직접 간접으로 협력하였다. 식읍에서 들어오는 수입은 일반 수세지에서 들어오는 수입보다 물량면에서 많았으며, 이러한 수입을 바탕으로 소유지를 확대하고 다량의 노비를 확보하는 것도 가능하였다.

최충헌 집권 때에 식읍 3000호, 식실봉 300호로 정해졌던 지급 액수는 최씨 막부의 설치와 추가적인 봉작이 이어지면서 그 액수가 증가되기는 하였으나 진주지역 안의 일부 민호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우 대에 이르면 진주 모든 지역이 최우의 식읍으로 지정되었던 것으로 나타나며 이에 따라 그 사적인 지배력이 고을 전체에 관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세가의 식읍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경제적 지배의 실상이나 식읍 안에 주민의 경제적 사정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중기에 이르러 침체되었던 진주 출신 인물의 중앙 진출이 무신 집권 이후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에서 보면 최씨 집권 시기 이래 토착 세력의 진출에는 어느 정도 유리한 여건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주는 고려시대 여덟 목의 하나로 발전하면서 경상도 지역에서 행정적으로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어 농업 생산량이 비교적 풍부한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지방관들이 수탈을 할 수 있는 소지가 그만큼 많았으며, 또한 토호들의 세력이 강성하여 하층민의 피해도 다른 지역에 견주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정은 정방의의 난에 앞서서도 진주에서 민중의 소요가 발생하였던 것에서 감지할 수 있다. 곧 명종 16년 당시 진주목사가 백성들을 침탈함으로 농민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반란을 도모했던 사실이 있다. 이때는 정부가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목사를 유배함으로써 무마될 수 있었지만, 정방의의 난과 더불어 진주지역 백성들의 처지나 동향을 이해하는 자료로 주목할 만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때의 진주지역의 혼란은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차후 진주정신이란 독특한 지역정신 형성에 큰 바탕이 될 것임을 예견할 수도 있었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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