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고려·조선 시대를 초월한 명사들의 진주예찬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고려·조선 시대를 초월한 명사들의 진주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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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2.16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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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 문신 朴融 촉서루를 품은 진주 절경 극찬
남명 문하 姜濂은 임란 후 촉석루에 우국시 남겨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6> 진주 촉석루 시문 현판 고찰 (4)

 

지난 제3호부터는 진주의 많은 문화유산들 중에서 진주성 촉석루 안에 현판으로 지금도 걸려있는 전대(前代)의 유명한 문걸(文傑)들이 남긴 시문(詩文)과 그들의 행적과 사상을 살피기로 했다.

금번 제6호에서도 진주성 촉석루를 노래한 고려·조선 양조에 뛰어난 명인들의 촉석루에 관한 시와 그들의 행적과 사상을 계속 소개하기로 한다.

이번 호에서는 먼저 조선 세종 때의 문신이었던 박융(朴融)의 작품과 그의 일생을 작품중심으로 살피고, 이어 조선 중종때 문신인 강렴(姜濂)의 촉석루 현판에 걸린 시문(詩文)을 감상하고, 동시에 그의 행적과 사상도 고찰하기로 한다.

우당(憂堂) 박융(朴融)
우당(憂堂) 박융(朴融)

晉山形勝冠南區 (진산형승관남구) 진주의 경치는 남쪽에서 으뜸인데

況復臨江有此樓 (황복림강유차루) 하물며 남강 가에 촉석루까지 세웠구나.

​列峀層巖成活畫 (열수층암성활화) 펼쳐진 산 층암절벽 그대로 그림이요,

​茂林脩竹傍淸流 (무림수죽방청류) 맑은 물 흐르는 강가엔 대숲이 무성하구나.

靑嵐髣髴屛間起 (청람방불병간기) 병풍사이로 마치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듯 하고

白鳥依稀鏡裡浮 (백조의회경리부) 백조는 어렴풋이 거울 속에 떠 있는 듯

已識地靈生俊傑 (이식지령생준걸) 진주땅 영험이 있어 뛰어난 인물들 많이 나올 줄 알았노라.

盛朝相繼薛居州 (성조상계설거부) 성조에 착한 신하 끊이지 않고 나오네.

상기 시는 진주의 절경을 표현하면서 진주의 생김새를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병풍의 그림 같기도 하고, 물에 뜬 백조가 거울 속에 비치는 모습 같다는 표현으로 진주의 아름다움을 극찬한 한 폭의 그림으로 비유한 훌륭한 시이다. 600년 이상의 긴 세월이 흘렀건만 이 시로 하여금 작가를 지금 바로 만나보고 있는 듯 하게 느끼게 하는 명시이다.

작가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유명(惟明)이며, 호는 우당(憂堂)인 박융(朴融)이다.

1408년(태종 8년) 생원시를 거쳐 같은 해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문한(文翰0 계통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1411년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6일에 있었던 취각(吹角) 때에 간관들이 어떤 이유에 의해 모두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간관 전원이 면직처분을 받게 되었는데, 그도 사간 정준(鄭俊), 헌납(獻納) 정지아(鄭之雅)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뒤에 재서용(再敍用)되어 전한(典翰)이 되었지만, 1418년에는 윤림(尹臨) 등 25인과 함께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벼슬의 임명장이 환수되었다가 곧 재서용 되었다.

1423년 1월(세종 5년) 강원·황해·평안도에 지난해의 기근으로 인해 기민이 크게 발생하자, 해당지역 수령들의 진제(賑濟) 상황파악을 위해 경차관을 파견하였는데, 그도 이조좌랑으로 강원도에 파견되었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군수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우당집(憂堂集)’이 있다.

다음으로는 조선 중종 때 학자이자 문신인 강렴(姜濂)의 시를 소개하기로 한다. 본 작품도 역시 현재 촉석루 안에 걸려있다.

만송(晩松) 강렴(姜濂)
만송(晩松) 강렴(姜濂)

南烽日警陷諸州 (남봉일경함제주) 남쪽 여러 고을 함락된다고 봉화 날마다 오르고

​劍語秋燈對白頭 (검어추등대백두) 가을 등불아래 노인들 마주 앉아 피난걱정 한다네.

​安得良籌除海侵 (안득양주제해침) 바다 요기 없앨 계책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君歌我酒更登樓 (군가아주경등루) 다시 누에 올라 그대는 노래 나는 술로 어울려 보자꾸나.

상기 시는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안정이 되자 마음 조였던 불안한 심정을 달래고 괴로웠던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또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누에 올라 노래하고 술마시며 즐길 수 있는 평화가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과 또 좋은 전략으로 왜구를 모두 제거하고픈 욕심에서 지은 시라고 볼 수 있다.

상기 시를 지은 강렴(姜濂)의 호는 만송(晩松)이고 본관은 진양(晉陽)으로 조선시대의 문인이었다.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인보(仁輔)이고 약관의 나이에 산천재(山川齊)로 찾아가 남명 선생을 뵙고 ‘경의(敬義)’와 ‘명성(明誠)의 설을 들었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쳐들어오자, 강렴은 말하기를 “지금이야말로 사생취의(捨生取義)하고 살신성인(殺身成仁)할 때이다.”라고 하였다. 이어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 등과 함께 사재(私財)를 털어 군비를 조달해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형세가 좋지 못하여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각재 하항(覺齋 河沆) 사호 오장(思湖 吳長) 등과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었다.

강렴은 1592년 촉석루에 올라 우국시를 남겼다.

 

강신웅

본지 주필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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