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문인 문걸들의 시대 탄식과 충절의 숨결이 스며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문인 문걸들의 시대 탄식과 충절의 숨결이 스며
  • 경남미디어
  • 승인 2018.12.2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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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문신 白文寶 혼란한 시대 한탄 명 시문 남겨
조선중기 河溍도 촉석루에 올라 시절의 애환을 노래

<7> 진주 촉석루 시문 현판 고찰 (5)

제3호부터 지금까지 주로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서 유명한 문신·문걸들이 진주·진양 경관 그리고 남강과 촉석루에 관해 지어졌던 시문(詩文)을 그들의 행적과 함께 소개했다.

이번 제7호에서는 상기 관련 내용의 기사는 우선 끝내고, 다음부터는 진주성내에 있는 주련(柱聯)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오늘은 먼저 고려말 극도의 혼란시기에 당시의 이단과 세류에도 동요되지 않고 오직 정직하고 청렴결백했던 문신이자 문걸이었던 백문보(白文寶)의 촉석루 관련 작품과 그의 행적 및 사상을 기술하기로 한다.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의 작품

登臨偏憶舊遊時 (등림편익구유시)

누대에 오르니 옛날 노닐던 때가 생각나

強答江山更覓詩 (강답강산경멱시)

강산의 화답하려 시 한수 안지으랴.

國豈無賢戡世亂 (국기무현감세란)

난세를 평정할 인재가 나라에 어찌 없으리.

酒能撩我感年衰 (주능료아감년쇠)

술에 가득 취하니 늙음이 실감나네.

境淸易使塵蹤絶 (경청역사진종절)

깨끗한 경치 속진을 멀리했지만

席闊何妨舞手垂 (석활하방무수수)

넓은 자리는 춤놀이에도 어찌 좋지 않으랴,

點筆謾成春草句 (점필만성춘초구)

붓에 먹을 찍어 <춘초구>를 짓고

停杯且唱竹枝詞 (정배차창죽지사)

술잔을 놓고 <죽지사>를 노래하네.

妓從坐促爲歡密 (기종좌촉위환밀)

자리에 가득한 기생들은 바싹 앉아 더욱 정답고

人與時偕欲去遲 (인여시해욕거지)

사람들은 시절이 너무 좋아 그냥 가지 않으려네.

此地高懷眞不世 (차지고회진불세)

이곳의 높은 회포 진정 속세와 다르니

赤城玄圃未全奇 (적성현포미전기)

신선이 산다는 적성현포만이 기이한 곳이겠는가.

※ 이 시에서 적성은 천태산 입구, 현포는 곤륜산에 있는 신원의 동산을 뜻한다.

상기 시를 지은 담암 백문보(淡庵 白文寶)는 고려 말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직산(稷山)이고 자는 화보(和父), 호는 담암(淡庵)으로 부사 견(堅)의 아들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춘추검열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급제, 춘추검열(春秋檢閱)을 거쳐 우상시(右常侍)에 이르렀다. 공민왕(恭愍王) 초에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있으면서 과거에 10과를 둘 것을 주청하였다.

뒤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고, 1363년(공민왕 12년) 앞서 일어났던 홍건적의 난으로 사국(史局)의 사초(史草)와 실록이 대부분 없어졌으므로 청주에 머물러 있던 공민왕이 공봉(供奉) 곽추(郭樞)를 시켜 남은 책을 해인사(海印寺)에 옮기도록 명하자, 서울에 있던 그는 김희조(金希祖)와 더불어 난리가 겨우 수습된 마당에 국사(國史)를 옮기면 민심이 동요될 것이라 하여 곽추를 만류하고 뒤의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뒤에 신라시대의 숭불(崇佛)이 나라에 미친 폐단을 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공민왕의 환도(還都) 후 환안도감(還安都監)이 설치되어 김경직(金敬直)과 함께 그 일을 주관하게 되자 해인사의 『삼례도(三禮圖)』와 『두우통전(杜佑通典)』을 가져오게 하여 『두우통전』을 본뜨고 또 박충(朴忠)의 말을 추려서 의제(儀制)를 만들었다.

1373년 우왕(禑王)이 대군이 되어 취학하자 그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직산군(稷山君)에 봉해졌다. 이제현(李齊賢)·이달충(李達衷)과 함께 고려의 국사를 찬할 때, 그는 예종(睿宗)과 인종(仁宗)의 양조(兩朝)를 초(草)하였다.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정직하며 이단에 의혹되지 않고 문장에 뛰어났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어서 조선중기의 진주출신으로 인조(1624년)때 생원과 진사의 양시에 합격할 정도의 뛰어난 문재와 효성이 지극하고, 동시에 불의에 대한 거침없는 직언을 잘했던 태계(台溪) 하진(河溍)의 작품과 행적을 소개한다.

 

태계(台溪) 하진(河溍)의 작품

滿目兵塵暗九區 (만목병진암구구)

눈에 가득 난리의 먼지로 온 나라가 어두운데

一聲長笛獨憑樓 (일성장적독빙루)

긴 피리 한 소리에 홀로 다락 기대었네,

孤城返照紅將歛 (고성반조홍장렴)

외딴 성엔 낙조도 붉은 빛을 거두고

近市晴嵐翠欲浮 (근시청람취욕부)

저자엔 맑은 안개 푸른 기운 떠있네.

富貴百年雲北去 (부귀백년운북거)

부귀 백년의 구름은 북으로 가고

廢​興千古水東流 (폐흥천고수동류)

흥폐 천고의 물은 동으로 흐르누나.

當時冠蓋今蕭索 (당시관개금소색)

당시의 고관대작들 이제는 아무도 없는데

修道人才半在州 (수도인재반재주)

그 누가 인재의 반이 진주에 있다고 했던가.

 

상기 시를 지은 하진(河溍)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진백(晉伯), 호는 태계(台溪)이다. 대사간 결(潔)의 7세손으로, 공효(公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윤기(尹起)의 딸이다. 이각(李殼)의 문인이고, 어렸을 때 덕천서원(德川書院)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624년(인조 2년) 생원·진사의 양시에 합격하고, 1633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임명되었으나, 부모봉양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에 추대되어 상주에 이르렀다가 아버지의 상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상을 마친 뒤 병조낭관·헌납·지평을 역임하다가 신병과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사임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 다시 지평으로 부름을 받고 나아가 사은한 다음, 김자점(金自點)의 전횡을 탄핵하고 즉시 사임, 귀향하였다. 그 뒤 여러 번 장령·사간·집의로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관후한 성품으로 직언을 잘하였다.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에 배향되었고, 저서로 『태계문집』 4권이 있다.

 

강신웅

본지 주필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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