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4. 항일의병(抗日義兵) 운동과 진주의병(晉州義兵) (하)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4. 항일의병(抗日義兵) 운동과 진주의병(晉州義兵) (하)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5.15 10: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응규 중심 격렬했던 진주의병운동 일제강점기에 종지부

진주의병 기세 너무 격렬해 일본 경무청 속수무책
경남 일원 동래 부 제외하고 모든 지역 의병 천하

진주의병 노응규 1만 대부대 이끌고 부산까지 진출
일제 침략의 발판 일본인들 거주지 부산 공략 시도

을사조약 체결되고 핵심 인물들 체포에 의병활동 무산
노응규 옥고 중 병사…일제강점기 슬픈역사 속 사라져
경남서부보훈지청 현충시설물로 지정된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에 소재한 ‘노응규 의병장 생가’
경남서부보훈지청 현충시설물로 지정된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에 소재한 ‘노응규 의병장 생가’

1896년 2월말에 노응규를 비롯한 진주의병의 기세가 너무 격렬해서 진주 경무관이었던 김세진은 그들을 진압하고자 수차례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리고 당시 진주 참서관 오현익과 함께 그는 대구부나 동래부 관찰사에게 일본군까지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여기서 더욱이 을미왜란 이후 고종이 각지의 의병장에게 의병 궐기를 고무하는 밀지(密旨)까지도 있었는데, 충청도의 류인석, 강원도의 민용호, 경기도 김하락 의병장 등에게 내린 것과 유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경무관 김세진이 이끄는 관군이 일본군과 함께 현풍(현재 경북 달성군 현풍면)을 거쳐 진주로 향했지만 번번이 패퇴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경남 일원은 동래부 일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지역이 의병 천하가 되었다. 진주 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의 기세를 꺾고 난 뒤에는 사기가 더욱 충천(衝天)했다. 이 기세를 몰아 그들은 일제 침략의 발판이자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부산 공략에 나섰다.

당시 일제는 진주 의병의 김해, 부산 방면의 진출에 대해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면서 면밀히 정보를 수집하여 의병들의 움직임에 대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시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 의하면 선발대로 보이는 진주의병의 일부가 김해에 진출한 것이 3월 29일(양력) 새벽으로 나타난다. 이들 의병의 군세는 대략 일백여 명에 불과했으나 관아를 점령하고 부왜(釜倭) 군수를 체포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수가 이미 의병의 내습을 예견하고 부산으로 달아난 뒤였기 때문에 본진의 명령에 따라 전곡(錢穀)을 충분히 갖추고 훈련하였다. 한편 상인 또는 노동자로 가장하여 김해, 구포, 부산 등지는 물론 일본인 거류지까지 잠입하기도 했다.

한편 노응규가 이끄는 본진이 일만 여명의 대부대를 이루어 김해에 다다랐다. 이들은 대부분 전투 부대가 아니었으며 또한 일본군 본진이 부산에 있던 관계로 직접적인 접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4월 12일 일부 의병들은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일본군 넷을 살상시킨 한편 의병 네 사람이 전사하였고 2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진주 의병은 무기의 열세와 의병진 수뇌부의 의견 차이로 진주로 회군하고 말았다. 진주로 돌아온 직후 정한용(鄭漢鎔)이 주축이 된 오백여 명이 삼가에, 서재기(徐再起)가 이끄는 오백여 명이 함양 안의에 각각 분산 배치되었고, 노응규는 소수의 병력으로 진주 병영에 남아 있었다.

이 무렵 서울 시위대 병력을 이끌고 의병 진압을 위해 호남에 파견되었던 참령(參領) 이겸제(李謙濟)는 기우만(奇宇萬)이 이끌었던 의병을 해산시킨 다음 진주로 향했다. 이겸제는 시위대 병사 오백 명과 대구 진위대 병사 이백 명을 이끌고 와서 4월 24일 밤 성벽을 부수고 공격하였다. 이로써 석달 너머 이어졌던 진주 의병들의 토왜투쟁(討倭鬪爭)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이겸제가 이끄는 관군이 진주에 도착했을 때는 진주 의병은 이미 해산된 뒤였다. 전라도 의병을 진압하고 진주로 말머리를 돌린 이겸제는 어느 곳의 경우처럼 진압 작전을 전개하기 며칠 전부터 고종이 내린 ‘의병해산령’을 진주 의병부대에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노응규는 고종의 의병 해산령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주변을 정리하여 진주성을 나왔으며, 이겸제가 이끄는 관군이 진주에 도착했을 무렵 그는 삼가를 거쳐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노응규는 진주성 안에서 의병을 해산하고 삼가에 주둔하던 정한용 부대에 들렀다가 그와 알력이 있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안의에 머무르고 있던 서재기 부대도 안의 서리배의 흉계에 의해 서재기가 피살당하자 흩어지고 말았다. 이로써 경남 일원을 휩쓸었던 진주 의병은 완전히 해산하고 말았다.

삼가 감옥을 빠져 나온 노응규는 십여 명의 의병과 함께 거창으로 향했는데, 그의 부형(父兄) 역시 안의의 서리배에게 각각 화형과 총살형을 당했다는 비보를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상경했다가 전라도로 피신하여 광주, 남원 등지를 전전했다.

고종이 아관(俄館)에서 돌아오자 노응규는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 직접 도끼를 등에 지고 궐내에 들어가 상소를 올리다.)’를 올렸고, 정한용은 ‘사면소(赦免疏)’를 올려 각각 비답(批答)을 받았다. 이후 노응규는 귀향하여 생활하기도 하고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노응규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하다가 1906년 11월 중순에 충청도 황간으로 들어가 세력을 규합해 재차 의병을 일으키려 햇다. 그러나 이 일이 노출되어 핵심 인물들이 순검에 체포되면서 의병활동은 무산되었다.

노응규는 서울 경무청으로 압송되었고 옥에 갇혀 심문을 받다가 병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1890년대 말부터 1906년도 말까지 노응규를 중심으로 격렬하게 일어났던 진주의병운동(晉州義兵運動)에 종지부(終止符)를 찍으면서, 일제 강점기라는 우리민족의 치욕(恥辱)과 통한(痛恨)의 슬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강신웅(姜信雄)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대로 988, 4층 (칠암동)
  • 대표전화 : 055-743-8000
  • 팩스 : 055-748-14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선효
  • 법인명 : 주식회사 경남미디어
  • 제호 : 경남미디어
  • 등록번호 : 경남 아 02393
  • 등록일 : 2018-09-19
  • 발행일 : 2018-11-11
  • 발행인 : 황인태
  • 편집인 : 황인태
  • 경남미디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미디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7481400@daum.net
ND소프트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이선효 055-743-8000 74380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