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33화 금성대군의 충절
[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33화 금성대군의 충절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7.2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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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이 형 수양대군에게 맞서다

충직한 금성대군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에게 등 돌리며 갈등
역모 죄로 몰린 금성대군 삭녕으로 유배 떠나
수양대군 단종 주위 인물 모조리 제거하고 왕위 찬탈

금성대군 유배지 순흥에서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해
세조 군사를 보내 순흥 지역을 피바다로 만들어
32세 금성대군 형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사사

금성단_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및 그와 연루되어 순절한 분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설립된 제단(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재)
금성단_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및 그와 연루되어 순절한 분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설립된 제단(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재)

-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덟 아들 중에서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아버지 세종과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자신의 조카 되는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 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

1. 금성대군을 역모로 몰다

 

금성대군 이유(李瑜)는 세종의 6남으로 태어났다. 12살에 전주 최씨와 혼인하여 아들 이맹한을 두었다. 그는 태조의 8남 방석의 봉사손으로 입양되었다. 세종이 병이 들어 요양이 필요할 때면 금성대군의 사저에서 기거하기도 하였고, 병석에 눕게 될 무렵에는 2개월여를 그의 집에서 체류하면서 요양을 할 정도로 금성대군을 아끼고 사랑했다. 또한 세종이 세자 문종과 함께 온천 행으로 함께 궁궐을 비울 때에는 세손 단종을 금성대군의 집에서 지내도록 한 적도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28세가 되던 해 둘째 형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부터 둘의 갈등은 심해졌다. 특히 어린 세손(단종)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금성대군으로선 수양대군의 야욕을 그냥 보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수양대군으로선 금성대군이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데 최고의 걸림돌이 되고 만 셈이었다. 즉 제거 대상 1순위가 되고 말았다.

금성대군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명분이나 꼬투리가 필요했다. 이에 계양군이 나섰다. 그는 금성대군이 화의군 등과 세력을 규합하고 있다는 무고 상소를 올렸다. 계양군은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전에도 안평대군을 제거하기 위해 무고하는 상소를 올려 바람잡이 역할을 한 적이 있던 사람이었다. 과잉충성을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앞장서는 사람이었다.

단종 3년 2월, 금성대군이 사저에서 화의군(세종의 제1서자) 등을 모아 활쏘기 대회를 가졌는데 이를 문제 삼았다. 이 일로 하여 관련자들을 하옥하고 금성대군은 대군의 직위를 박탈했다. 그러나 활쏘기 대회는 대군들이 수시로 하던 일종의 취미활동이었다. 수양대군도 대군 시절에 사저에 무인들을 모아 수시로 활쏘기 대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이유만으로 금성대군에게 대군의 지위를 박탈하는 죄를 주기에는 명분이 너무 약했다.

급기야 일부 대신들과 사간들이 금성대군의 죄목을 밝히라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그러나 죄를 주기에는 명분이 부족했지만 그냥 물러설 수양대군이 아니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단종의 주위를 모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수양대군의 세력들은 금성대군에게 또 다른 죄를 씌워 역모로 몰아갔다.

- 금성대군이 몰래 양씨(세종의 후궁이자 단종의 유모)와 결탁하고 화의군이 비밀히 양씨와 금성대군의 집에 출입하였다. 또한 금성대군이 금대(金帶)를 영양위(문종의 사위이자 경혜공주의 남편)에게 내려주었고, 계집종을 상궁 박씨에게 기증하면서 서로 결탁하였다. 수춘군(혜빈 양씨의 아들)이 일찍이 병이 드니, 금성대군의 집에서 늘 기도하였다. - < 단종실록> 단종 3년 3월 21일 기사 중에서


서로 자주 왕래하며 금대나 계집종을 하사하였고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만남을 가졌다는 것이 수양대군이 제시한 역모의 증좌였다. 군사적 행동이나 모반의 흔적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죄목은 역모였다.

이로 인하여 금성대군을 삭녕으로, 영양위를 영월로, 혜빈 양씨를 청풍으로 귀양 보냈다. 심지어 경혜공주가 어린 시절에 피접 나갔을 때 봉양해 주었던 조유례까지 죄를 씌웠으니 단종의 주위는 한 명도 남지 않았다.

결국 이날 단종은 양위를 선언했다. 더 이상 기댈 언덕이 사라진 단종은 형식으로는 선위를 한다고 했지만 강제로 왕위를 뺏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2. 정축지변

 

금성대군이 삭녕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중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위기의식을 느낀 세조는 금성대군의 유배지를 경상도 순흥(지금의 영주)으로 멀리 옮겨 위리안치 시켰다. 가시울타리를 치게 하고 외부인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이곳 순흥 부사는 이보흠이었다. 그는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어서 세조로선 탐탁지 않는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이보흠은 안평대군과도 절친한 사이었다. 그래서 사관으로 선발되어 세종실록을 편찬하고 있던 그를 순흥부사로 좌천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성리학의 본고장이면서 안향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비들의 절의정신이 어느 지역보다 높은 곳이기도 하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 금성대군을 귀양 보낸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어쩌면 금성대군과 이보흠이 역모를 일으키도록 배려(?)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단종이 영월에 유폐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금성대군은 이보흠과 힘을 합쳐 단종복위를 계획했다. 순흥과 안동 지역에서 호응하는 세력이 대단했지만 거사를 실행에 옮겨보지도 못하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세조는 조사 과정에서 철저한 보복을 했는데 실로 그 과정은 처참했다. 금성대군을 사사시킨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관련자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살육은 한 달 넘게 계속되었다. 이때 피살된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온통 피로 물들어 십여 리까지 핏물이 넘쳐났다. 그 핏물은 지금의 동촌1리까지 이어졌는데 이곳에 이르러서야 핏물이 끝났다고 하여 이 마을을 피끝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사건은 정축년에 일어난 참사라고 하여 정축지변이라 부른다.

가장 많이 희생된 가문은 순흥 안씨였다. 안향의 후예인 이들은 모두 죽임을 피하지 못하였다. 더러는 살아남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몰래 외지로 도망하였다. 그래서 순흥 안씨들이 지금도 전국으로 흩어져 살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야사에 의하면 순흥도호부 주변 30리에는 사는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만큼 많이 죽었는데 세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순흥도호부를 아예 폐지해 버리고 순흥 땅을 인근 지역으로 나누어 편입시켜 버렸다. 당시 교통, 물산의 중심지였던 순흥이 폐허로 변해버린 원인이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3. 사후

금성대군은 사사되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그의 아들과 손자는 청주 관아의 노비가 되었으며 서자 역시 노비가 되었다.

세조는 정축지변에 관한 모든 기록을 파쇄하여 흔적을 남지지 않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이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다. 야사나 구전에 의해 전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실록에서는 사실을 왜곡, 축소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금성대군의 저항정신을 온전히 기릴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금성대군은 숙종, 영조 때 단종이 복위되고 그를 따르던 신하들이 복권되면서 함께 복권된다. 그와 함께 순직한 이보흠 등 충신들의 충절을 기리고 제사를 받들기 위해 숙종 때 제단을 만들었는데 그곳이 금성단(경북 영주시 소재)이다.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실패는 곧 단종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금성대군의 사사와 단종의 자살이 같은 날인 음력 10월 21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금성대군이 사사된 뒤 단종이 사사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이야기는 < 단종의 죽음 >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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