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35화 단종비 정순왕후의 눈물
[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35화 단종비 정순왕후의 눈물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8.12 14: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양대군에 의해 간택되지만 비극의 주인공으로 전락

수양대군이 친구인 송현수의 딸을 단종 비로 간택
보위에 오른 세조 송현수를 토사구팽 해
왕비가 된 지 1년 6개월 만에 왕대비로 물러나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군부인으로 신분 격하
멸문지화를 당한 정순왕후, 경혜공주 아들에게 의지

단종 비 정순왕후가 묻힌 사릉_경기도 진건읍 소재.
단종 비 정순왕후가 묻힌 사릉_경기도 진건읍 소재.

1. 정순왕후의 운명

정순왕후 송씨는 송현수의 딸로써 15살의 나이에 한 살 아래인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되었다. 송현수는 수양대군과 막역한 사이로써 일찍이 그의 여동생이 수양대군의 막내동생인 영응대군에게 출가하여 왕실과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 훗날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은 뒤에 수양대군은 송현수의 딸을 단종비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왕비가 된 정순왕후는 왕비의 자리도 잠시, 왕비가 된 지 1년 6개월여 만에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어린 나이에 왕대비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곧이어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추진하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왕대비 송씨는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그녀의 비운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종이 사사되고 난 뒤 평민으로 신분이 격하되었으며, 친정 집안은 멸문지화에 가까운 화를 입었다. 친정 아버지 송현수도 교형을 받아 처형되었으니 세조에게 토사구팽된 셈이다.

권력이란 부자지간에도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없는 괴물이다. 그러니 수양대군과 송현수가 아무리 가까운 친구 사이라고 하더라도 권력 앞에서 우정이란 아무 쓸모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서로가 장애물이 될 뿐이었다.

2. 궁핍한 삶

귀양 가는 단종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온 그녀는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에서 작별을 하였다.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그녀도 몰랐으리라. 세조가 마련해 준 거처를 마다하고 그녀는 동대문 밖 청룡사 근처에 초가집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생활이 궁핍하여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다가 호구지책으로 옷을 만들고 염색을 하며 빨래를 해 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룡사 근처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명주를 담갔더니 자주색 물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 명주를 널어 말렸던 바위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자주색으로 채색되는 샘물)이라 새겨져 전해지고 있다.

이런 궁핍한 생활을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그녀의 집으로 먹을 것을 건네주고자 시장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불행은 끝이 없었다. 영도교에서 남편을 이별한 지 4개월, 남편의 무사귀환을 염원하던 정순왕후에게 들려온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남편의 죽음 소식이었다.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집 뒤 동산에 올라 남편의 명복을 빌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세조는 백성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 정순왕후를 정업원으로 이주시켰다. 정업원은 왕의 후궁들이 궁궐에서 나와 거처하던 곳이었다.

훗날 영조가 이 사실을 알고 동쪽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다는 의미로 그 동산을 동망봉(東望峯)이라 이름하고 친히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일제 강점기 때 이곳이 채석장으로 사용되면서 그 바위는 소실되어 지금은 표지석만 남아있다.

동망봉 표지석_정순왕후가 동쪽을 바라보며 남편 단종의 명복을 빌면서 통곡했다는 집 뒤 동산에 훗날 영조가 세운 표지석.
동망봉 표지석_정순왕후가 동쪽을 바라보며 남편 단종의 명복을 빌면서 통곡했다는 집 뒤 동산에 훗날 영조가 세운 표지석.

3. 가산을 정리하다

친정 집안은 멸문지화를 입었고 게다가 늘 의지하고 지내던 시누이 경혜공주(단종의 누이)마저 먼저 서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아들처럼 의지하고 사랑했던 경혜공주의 아들인 정미수도 죽고 나니 그녀의 노년은 참으로 외로웠다. 그녀가 죽기 몇 년 전,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를 시양자로 삼고 재산을 정리하여 노비문서와 함께 정미수의 아내에게 상속하였다.

82세가 되던 해, 정순왕후는 한 많은 삶을 마감하고 눈을 감았다. 그녀가 죽을 때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묻힐 한 평의 땅도 없었다. 그래서 해주 정씨(경혜공주의 시가)의 배려로 해주 정씨의 종중 땅(지금의 경기도 진건읍 사릉리 소재)에 묻혔다. 남편 단종의 능이 영월에 있으니 그녀는 죽어서도 남편과 함께하지 못한 비운의 여인이 되었다. 조선왕릉 중에서 왕비가 왕의 곁에 묻히지 못한 경우는 태조, 단종, 중종밖에 없다. 함께 묻히지 못한 사연들이야 다 있지만 생이별의 아픔을 지닌 채 잠든 경우는 사릉이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4. 복위

중종 초기, 사림파인 조광조 등에 의해 복위가 주장됐으나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숙종 때에 와서 단종이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도 함께 왕비로 복위되었다. 왕비에서 물러난 지 240여 년이 지난 뒤였다. 해주 정씨의 종중 땅에 묻혀 있던 그녀의 무덤도 왕릉으로 격상되었다.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이름 지었는데 이는 억울하게 죽은 남편을 사모(思慕)한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녀의 무덤 주위에는 이미 해주 정씨의 무덤들이 여럿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를 이장해야 할 판이었다.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의 무덤도 가까이 있었다. 시양자였던 정미수의 후손이 단종과 정순왕후의 제사를 봉사하여 왔던 터라 해주 정씨의 여러 무덤들을 이장시키지 않고 왕릉을 복위하는 것으로 숙종은 어명을 내렸다.

멀리 영월에 묻힌 남편이 그리워 그녀의 무덤 주위 소나무 가지들이 동쪽을 향해 뻗어 있었다니 그녀의 그리움은 5백 년이 흐른 오늘에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듯하다. 현대에 들어와서 단종과 정순왕후를 합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때 제기되기도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그런데 1999년 4월 9일, 사릉에 심어져 있던 소나무 하나를 장릉(영월)에 옮겨 심고 정령송(精靈松)이라 명명했다. 영원히 남편 곁으로 다가가지 못한 정순왕후, 비록 그 혼령이 소나무에 깃들어 남편 곁으로 옮겨졌으니 실로 사후 478년만의 해후가 아닐까.

다음 이야기는 <영양위 정종(鄭悰)의 최후>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